2019 상하이 호텔여행 2. 페이퍼 H12 (Paper H12)
이번 상하이 출장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알아본 숙박 형태는 복합형 시설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상하이도 코워킹 스페이스가 크게 늘어났는데, 최근에는 호텔까지 결합되는 추세여서 꼭 경험해보고 싶었다. 막판에 가격과 위치가 적당해서 몇 가지 선택지 중 별 생각없이 예약한 페이퍼 H12가, 이번 상해 여행의 (여러가지 의미에서) 하이라이트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호텔여행을 계속 하면 할 수록, 역시 숙소의 시설보다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여행 자체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걸 매번 느낀다.
페이퍼 H12와의 첫 만남
막판까지 이 호텔 저 호텔 고르다가 아고다에서 반짝 특가가 나온 걸 보고 겨우 예약을 마쳤다. 호텔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내심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디디 택시에 분명 정확한 주소를 찍어서 도착했는데도, 내가 내린 곳에는 호텔 입구가 보이지도 않았다.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골목들은 일단 대로변에서 내린 후에 알아서 찾아 들어와야 한다. 호텔은 화이하이루의 깊숙한 안쪽 골목에 비밀스럽게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내가 맞닥뜨린 첫 인상은, 호텔이 아니라 공동 사무실 '코워킹 스페이스'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도대체 누가 체크인을 해주는 거지? 여기 숙박시설 맞나?
이때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창한 영어로 체크인 절차를 안내해준 그녀는 이곳의 매니저 앨리스였다. 이곳은 코워킹 스페이스이기도 하지만, 여러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는 5층짜리 사무용 빌딩이다. 그래서 숙박 시설은 엄밀히 말하면 호텔보다는 에어비앤비에 가깝게 운영되는 시설이라, 별도의 법 적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상하이의 홈스테이 숙박 시설은 캠으로 얼굴을 촬영하여 디지털 신원 확인을 철저하게 한다. 셀프 체크인에 가까운 일련의 투숙 절차를 마치고, 5층의 숙소로 향했다.
1층은 코워킹 사무실, 2~4층은 스타트업 입주 공간, 그리고 5층에는 총 5개의 객실이 있다. 다 올라오니 만성 운동부족인 나는 금새 숨이 가빠온다. 이 건물은 오래된 건물을 리뉴얼한 건축물이라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다. 물론 상주하는 직원이 체크인/아웃 시 캐리어는 이동해 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매번 5층을 계단으로 이동하기 부담스럽다면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 5층의 공용 공간이 엄청 아늑하고 멋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트 갤러리와도 접목된 이곳 공간의 특성상, 아름다운 작품들이 다수 걸려 있다. 이곳에 준비된 각종 먹거리는 투숙객이라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데, 특히나 특급 호텔에서도 보기 힘든 와인 셀러의 무료 와인 서비스는 감동이다. 공용 미니 바에는 각종 음료와 칭다오 맥주가 항상 채워져 있다. 간단한 크래커와 스낵, 그리고 캡슐 커피 머신도 있어서 조식 서비스가 없다고 아쉬워할 틈이 없다.
햇살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501호
오 세상에. 다소 컴컴한 분위기의 인터컨 루이진에 있다가 이 곳에 왔더니, 환하게 내리쬐는 한 낮의 햇살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신다. 객실이 수 백개씩 있는 양산형 객실에서는 절대로 연출하지 못할, 낡은 건물 특유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와 백만불짜리 햇살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이 곳은, 사진으로 대충 본 그 객실이 아니었다. 너무 근사해서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그런 방이었다.
호텔이 위치한 화이하이 루는 상하이 시내 중심에서도 핵심 상업지구 중 하나다. 그런데 오래되고 깊숙한 골목 5층에 위치한 이 방에서는 어찌나 상하이가 고요하게 느껴지던지. 여느 호텔에서는 창문같지도 않은 창문 하나 있다고 추가금을 얹어 받는데, 이 방은 창문이 무려 2개나 뚫려 있다. 아침엔 두 창문의 린넨 커튼을 모두 올리고 귀한 햇살을 듬뿍 받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혼자 지내기 딱 좋은 크기의 객실인 만큼, 넓지 않은 공간 활용을 잘 해놓았다. 호텔 서비스의 스탠다드로 갖춰야 하는 모든 어메니티, 그리고 샤워가운까지도 오픈 형태의 장에 빈틈없이 준비해 놓았다. 미니 냉장고는 비어 있으니, 바깥의 공용 공간에서 원하는 음료를 가져다가 두고 꺼내 먹기 좋다.
화이트톤의 깔끔한 욕실은 샤워 부스와 구분되어 있는 심플한 구조다. 샤워실에는 말린앤 고츠의 제품들이 준비되어 있고, 변기 옆의 3단 함을 열어보니 각종 일회용품과 헤어 드라이어 등이 들어 있었다. 전반적인 준비나 청소 상태를 살펴보니, 호텔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호텔은 신규 오픈이 아니라 2016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벌써 3년 이상 운영하면서 나름의 공력을 쌓아온 호텔이다. 단지 내가 이곳을 늦게 발견했을 뿐이다. 상하이에 그렇게 왔으면서도 이런 입지에 이렇게 재미난 요소가 많은 호텔을 이제 알다니, 역시 상하이는 파도파도 끝이 없다는 생각 뿐.
아무래도 1~5층을 매번 걸어서 오르내리다 보니 건물 내부를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2층에 재미난 야외 테라스가 있는데, '디톡스 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보통은 2~3층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여기 잠깐 나와서 흡연도 하고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쓰는 듯 했다. 이곳 역시 카드 키가 있으면 출입할 수 있다.
여기서 맞닿아 있는 건축물의 분위기를 보면, 왜 이 일대를 통째로 재개발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지 잘 알 수 있다. 이 건축물과 골목 자체가 엄청난 자산이라는 걸, 상하이는 잘 알고 있다. 이 일대와 숙소의 상세한 영상은 곧 유튜브에 자세하게 소개하기로. nonie Kim 유튜브 바로 가기
에필로그, 고마움을 전하며
고작 2박을 묵었을 뿐인데 여기가 기억에 유달리 남는 이유는, 단지 특이한 컨셉트의 숙소여서가 아니라 고마운 마음 때문이다.
한창 전시장 취재 중에 숙소를 옮기느라, 낮에 체크인만 하고 늦게서야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과일 한 무더기와 크래커가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조식 서비스가 따로 없는 곳인지라 투숙객을 위해 기본 제공되는 듯 했지만, 따로 아침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는 내겐 유용한 서비스였다. 다음 날 나가면서 앨리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겸연쩍어 하던 그녀가 내 어깨에 걸린 에코백을 보더니 '어, 저 ILTM(럭셔리 트래블 마켓) 알아요. 리츠칼튼 상하이에 오래 근무했거든요'라며 회상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째서 럭셔리 업계의 커리어를 뒤로 하고 실험적인 곳을 선택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이 건물의 컨셉트와 배경에 대해 좀더 깊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ILTM 전시장에서 발을 잘못 내딛으면서 왼쪽 발을 삐끗했다. 잠시 쉬자 곧 괜찮아졌는데, 점심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통증으로 발전했다. 어찌저찌 숙소까지는 겨우 돌아왔는데, 매일 1층에서 인사하던 앨리스가 그날따라 보이지 않았다. 객실에 있는 전화기를 이용해 그녀의 핸드폰으로 사정을 얘기했더니, 근처 갤러리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그녀는 한 달음에 와 주었다. 신박한 약이 있다며 근처 중약방에 달려가 사다준 한방 스프레이는, 한국에서 써본 그 어떤 약보다도 빠르게 통증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리곤 배달 어플로 내가 먹을 저녁거리를 꼼꼼하게 주문해주곤 사라졌다. 그리곤 위챗으로 그 날도, 다음 날도 내 안부를 체크해 주었다.
그녀가 내게 준 도움은 단순히 호텔리어가 해줄 수 있는 수준의 도움이 아니었다.(물론 오랜 시간 단련된 호텔리어이기에 가능했던 대처이기도 하다) 신기한 한약 스프레이 덕분에, 다음 날 아침에는 곧잘 걸을 수 있게 됐다. 여행자로서의 나는 그저 나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느낀 동시에, 이 숙소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해에서 남은 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했다. 그녀의 선의와 도움에,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6년간 호텔여행과 강의를 하며 가장 많이 받은 '어디가 제일 좋아요?'라는 질문에, Top 3가 매번 바뀌어도 상하이는 고정인 이유가 바로 이런 '사람들' 덕분이다. 상하이는 이런 도시다. 정말로, 파도파도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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