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27일에 서울역에서 열렸던 독립출판 마켓 '제 4회 퍼블리셔스 테이블'에 다녀왔다.
2011년부터 전자책 1인 출판을 시작한 첫 세대로서, 지금도 콘텐츠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써 이런 행사가 활성화되는 것은 꽤 반가운 일이다. 3회가 2014년 즈음이니 오랜만에 열린 행사인데,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3일간 2만명이 넘게 왔다고 한다)
나 역시 이전에는 출판사가 주도하는 책 행사인 와우북 페스티벌이나 국제도서전을 주로 갔는데, 요새 대세는 확실히 독립출판 마켓이다. 선배격의 행사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아직 가보지 못해서 궁금증도 있었고, 최근 몇 년 새에 독립출판 시장의 규모가 상당히 커져서 과연 사람들이 무엇을 소비하는지 궁금했다. 출판 시장이 거의 붕괴하다시피 어려워진 상황에서, 독립출판 시장이 커진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현상이다. 책은 안 사고 안 읽는데, 독립출판물은 산다고? 정확히 '무엇'을 사기 위해 젊은이들이 이토록 몰려드는 것일까?
사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서울역까지 간 건, 마켓 때문만은 아니다. 주말에만 진행되는 공개 세미나 중에 여행 콘텐츠와 관련된 세미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스에 몰려든 엄청난 인파에 비하면 세미나에는 너무나 사람이 적어서 좀 의외였다. 내가 들은 세미나는 '여행 이후의 질문들'이라는 강연이다.
세미나에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독립출판이 가진 가치나 차별성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나만의 섬세한 레이더로 셀렉한 장소를 도시 별로 소개한다는 개념은, 이미 기성 가이드북에서도 보편적인 콘텐츠 기획법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승부처는 콘텐츠의 질과 저자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강연자가 발행하는 책 역시 독립출판으로서는 높은 퀄리티를 가진 시리즈로 알고 있는데, 창간한지 3년여가 지난 지금도 충분한 고정 독자나 인지도를 확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청중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여행일정을 짜주는 일은 안하냐'고 물었을 때, 그런 일은 안한다며 단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답변도 의아했다.(실제로는 일정을 디자인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질문의 의도는 '여행 콘텐츠가 가진 사업적 확장성'을 묻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지만, 저자는 그 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업적으로 잠재력을 가진 브랜드를 만들었음에도, 그 무기를 제대로 쓰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어 보였달까.
책보다는 굿즈에 가까운 셀링포인트
세미나가 끝나고, '여행'을 테마로 한 부스를 집중적으로 찾아 다녔다. 인상깊은 부스는 명함이나 연락처도 챙겼다. 하지만 끝끝내 내 지갑을 열게 한 콘텐츠는 찾을 수 없었다. 돈을 쓰기 위한 모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도 말이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내가 완성도나 퀄리티를 찾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업계에서 오래 일을 한 사람들이 찾는 건 '신선함'이다. 내 여행에, 내 콘텐츠에 뭔가 뒤통수를 치게 할 크리에이티브나 관점을 찾으러 이곳에 왔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을 테마로 한 독립출판물 대부분은 기성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어느 가이드북의 경우 형식은 '일러스트 가이드북'을 추구했지만, 선택한 장소와 그 곳을 소개하는 문구는 기존 가이드북과 완전히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오히려 문학/창작 분야에는 매력적인 책이 많이 보였다.
반면, 내 옆을 스쳐가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들은 '야, 지갑 털리는 거 한 순간이네. 여기 왜 이렇게 싸?'라며 호들갑을 떤다. 다들 더 못 사서 안달이 나 있다. 자세히 보면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것들은 책보다는 굿즈에 가까운 상품이다. 많은 부스들은, 내가 매년 참관하는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귀엽고, 예쁘고, 신기하고,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책이든 뱃지든 엽서든 크게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온라인 상에서만 보던 작가를 직접 만나는 '팬미팅'은 덤이다.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 우치누마 신타로 & 아야메 요시노부 지음, 김혜원 옮김/컴인 |
퍼블리셔스 테이블에서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실체를,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정리했다. 사실 국내 저자가 쓴 국내 독립서점 책들은 서점 나열식 소개에 불과한데, 일본인이 쓴 서울의 서점 이야기는 어찌나 치열하게 취재를 했던지.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잘 만든 책이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국인은 책을 텍스트라기 보다는 잡화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독립출판물이 굿즈다운 매력이 있다는 얘긴데, 한편으로는 기존 도서가 '물성'의 측면에서 진부하다는 반증도 될 것이다.
커리어 측면에서 본 독립출판
책에 보면 한국의 창작자(책에서는 뮤지션을 예로 들었다)는 '이걸로는 절대로 먹고 살수 없다'고 전제하고, 반드시 다른 일을 본업으로 두고 이쪽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신선한(실험적인) 콘텐츠를 찾기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독립출판이라면 메이저 시장에서 소화할 수 없는 독창적인 콘텐츠를 치열하게 기획해야 하는데, 실제 나온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어 본다'는 식으로만 접근을 하다 보니, 상품으로서의 존재 가치에 대해선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게 독립출판의 다양성이자 의의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나쁘게 볼 순 없다.
단, 내가 아는 한 많은 크리에이터와 저자들은 독립출판이든 기성출판이든 책을 내고 창의적인 일을 지속하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꿈꾼다. 누군가에겐 재미난 취미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직장을 벗어나 내 이름을 걸고 일하기 위한 다음 스텝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후자라면, '지속가능한' 콘텐츠 생산의 방법을 당연히 고민해야 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내 맘대로 만든 후 잘 안되면 그냥 말자는 식이라면, 사실 성취감보다는 좌절을 맛보기가 더 쉽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도전은 더더욱 어려워질테니 말이다. 실제로 내 커리어 수업에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이런 고민으로 나를 찾아온다. "저도 작가로 살고 싶은데, 해보니까 이걸로는 돈이 안 돼요! 어쩌죠?" 이런 류의 고민이 가장 일반적이다.
만약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커리어의 다음 스텝으로 준비하고 있다면, 콘텐츠 면에서는 독창성이, 사업적 측면에서는 1인 기업다운 비즈니스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기본을 새삼 절감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브런치에 따로 써보기로.
퍼블리셔스 테이블이나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자주 찾는 이들의 후기를 보면, 소위 힙스터적인 취향을 가진 젊은 독자들이 자신의 문화적 니즈를 채워주는 생산자와 직접 만나는 경험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어디서 본 글이지만, 아무리 니치한 콘텐츠라 하더라도 자신의 광팬, 즉 나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할 고정 소비자가 1천명만 된다면 생계 유지를 위한 시장이 형성된다고 했다. 확실히 1천명의 독자를 상정하고 상품을 만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접근 방식부터 큰 차이가 있다. 나 역시 출판보다는 강의가 메인 상품이기는 하지만, 지식산업에서의 상품은 본질적으로 '콘텐츠'이기 때문에 출판업과 같은 결의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확실히 콘텐츠 시장에서는 생산자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서 고정 독자(팬)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초심을 생각했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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