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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Australia

[서호주 자유여행]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만난 호주인 리처드와의 대화

by nonie 2009.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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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세이패시픽 비즈니스 클래스 의자.




퍼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사진을 단 한장도 찍지 못했다. 난데없는 비즈니스 클래스에 착석하는 바람에 긴장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사진놀이 따위는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무언의 분위기.... 내 옆자리에는 비즈니스 클래스는 쿨하게 열 댓번은 타봤을 것 같은 부유한 인상의, 그러나 캐주얼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좌석이 사진처럼 지그재그로 배치된 게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있어서, 사실 얘기를 건네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괜시리 먼저 잘난척 했다가 모처럼 앉은 럭셔리 좌석에서 망신살 뻗칠까봐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 심심해. 가이드북이라두 꺼내서 봐야겠다. 옆자리 아저씨는 이미 라이트를 켜고 페이퍼백을 열심히 읽고 있다. 나도 불이나 켜야지. 낑낑.

근데 내 자리 라이트를 어떻게 켜는 건지 모르겠는거다.ㅠ.ㅠ 양 옆 팔걸이의 수많은 스위치를 열심히 살펴보고 꾹꾹 눌러봤지만 애꿏은 의자만 누웠다 펴졌다 굽혔다....-_- 도대체 불켜는 버튼, 어디있는게야? 허둥지둥대는 내 모습에 옆 자리 아저씨도 계속 뭔가 알려주고 싶은 눈치다. 에라 모르겠다. 물어보자.;;; "죄송한데, 라이트 어떻게 켜셨어요?" 그러자 아저씨가 리모콘을 가리킨다. "여기 빨간 버튼 있죠? 이걸 누르면 켜진답니다"  OTL....

2시간이 더 흘렀을까. 메인 디너가 나오고 후식으로 와인과 치즈가 나올 때 즈음, 아저씨가 드디어 말을 걸어온다. "Well...그래서 너, 어디서 왔니?" (왠지 도착 전에라도 통성명을 해야겠다는 최소한의 예의랄까, 의례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호주 사람이고 홍콩에서 출장을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서호주에서 태어나 집과 직장이 모두 퍼스에 있다고 했다. 


nonie : 네.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Richard : 한국? 남한이요, 북한이요? 
nonie : -_-;;;;;;;;


아...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런 질문 한두번 받아본 건 아니지만, 받을 때마다 왠지 기분 묘하게 나쁘다. 사실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걸 인지하고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거긴 하지만, 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Topic이 이런 거 밖에 없나 싶어서 씁쓸해진다.


nonie: 전 서울에서 왔어요. 근데 참 이상하죠. 서양인들은 한국인을 만나면 꼭 당신과 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당신이 만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마 남한 사람일거에요. 
Richard : 아, 그런가요? 전 당연히 한국이 두 개의 나라라서 $%^&^((*)&*어쩌구저쩌구....음...그런데 요즘도 한국에는 시위(Demonstration)를 많이 하나요?
nonie: 시위요?? (끄응...)


이 아저씨가 골때리는 건지, 아님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이 한국을 이렇게 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암튼 어떻게 수습을 할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너무도 복잡한데, 난데 없는 시위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지? 영어도 딸리고 ㅠ.ㅠ


nonie: 최근에는 대규모 시위는 많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정권이 들어선 후로 한국의 경제가 어려워졌어요. 제 또래의 젊은 사람들은 지금의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Richard : (한숨을 쉬며) 그렇군요. 뭐 어느 나라나 경제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죠. 그런데 퍼스에는 무슨 일로 가나요? 여행? 출장?
nonie : 네. 저는 여행하러 가요. 실은 당신 나라의 관광청에서 Prize를 받았거든요. 재미있게 여행하고 제 블로그에 글도 쓸 거에요. 
Richard :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오, 멋지군요. 저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블로그나 글 쓰는 건 별로에요. (여행했던 나라들을 열거하며) 미국은 개인적으로 싫어하고, 캐나다는 좋아요. 필리핀에서도 오래 살았죠. 다음 휴가 때는 몽골을 꼭 가보고 싶더군요. 

   
리처드는 퍼스 시내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다. 그런데 뭐랄까. 서양인들 특유의 가식적일 만큼 친절한 태도가 그에게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뜻모를 차가움이 느껴졌다. 워낙 동양인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은 서호주 출신이라 그런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그닥 없었다. 한편으로는 좀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귀찮게 하지 않는 점은 편했다. 퍼스에서 볼거리를 추천해 달라는 내 질문에 몇 군데 뻔한 관광지를 나열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해변(Beach)에 가려면 꼭 아침에 가요. 대낮에 쐬는 서호주의 햇살은 정말 강력하거든요. 매우 위험해요" 

그는 마지막 배려로 내게 창가 자리를 양보했다. 비행기가 하강할 때 아름다운 퍼스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인다며, 자기는 벌써 수십번이 넘게 본 장면이라면서 말이다. 불행히도 도착 시각은 이미 밤 12시가 다 되어있었고, 창가에 코를 박고 열심히 바라보아도 눈 앞엔 컴컴한 어둠 속 몇몇 불빛 뿐이다. 그래도 난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작별 인사를 건네며 먼저 내렸다. 그리고 나는, 서호주의 심장 '퍼스'에 도착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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