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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Australia

[서호주 자유여행] 숙소에서 쓴 일기 #1. 나와 만나는 시간

by nonie 2009.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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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뽑은 커피, 롱블랙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오후 4시 반. 문득 뉴질랜드에서 마셨던 쓰디쓴 숏블랙의 향기가 겹친다. 뉴질랜드에서는 몰랐던 커피 이름, 롱블랙과 숏블랙. 이제 호주에서는 망설임없이 롱블랙을 주문할 수 있다. 한 번 실수해 봤으니까, 두 번째엔 안하면 되는 거지. 사랑도 그런 거 아닐까.

내게 남은 사진도 이제 없는데, 떠오르지 말았으면 하는 뉴질랜드가 자꾸 remind되는 걸 보니, 여기도 어쩔 수 없는 호주 땅인가보다. 지나면서 뵈는 상점들이 뉴질랜드와 같은 계열이 많다. 호주인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뉴질랜드와 호주 도심 풍경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더더욱 신기한 건, 동쪽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와서 관광을 한다는 것. 시드니랑 퍼스랑 뭐가 다를까? 아까 워킹투어에서 만난 시드니 언니한테 한번 물어볼껄. 아, 다른게 있긴 있구나. 여긴 시내버스가 공짜라는 거.




지난 뉴욕 여행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귀국하자마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아닌 고백을 하겠다며 곧장 뛰어갔던 나는 참으로 용감했다. 그때 그 마음이었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사실 상대방의 감정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을 잘못 골랐던 것 뿐. 그러나 지금은 상대방의 리액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정작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좀더 현실이 명확해진다면 포기도 빠를 것만 같은데. 이제 와서 자존심이 그렇게도 중요한 건지, 그건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 나, 참 생각도 많다. 퍼스까지 왔으니 버릴 때도 됐는데.
나는 여행지에 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현실은 어제와 같다. 어쩌면 나 혼자 옛날 생각하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그 쪽도 뭔가 달라지겠지 하는 헛된 기대. 뉴질랜드 때와 구조마저 비슷한 이 호텔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추억 되새김 밖에 없다는게 씁쓸할 뿐이다. 버릴 준비도, 잊을 준비도 하나도 되지 않았다는 걸, 여행을 오니까 비로소 알 것만 같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있을까? 진짜 바닥까지 내려왔다고 느끼는 지금, 완전히 모든걸 리셋하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금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꼭 해야 하는 한 가지, 뭐든지 망설이지 말고 정면으로 쾅 부딪히는 것. 그게 절대 상처가 아니라는 것, 지금 이 마음, 퍼스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좀더 clear 해지길.




2009년 2월 26일 with ♬브로콜리 너마저 @Hodiday Inn

 


→ 실은 동영상으로 객실을 찍었는데 너무 어지럽혀놔서 ㅠ.ㅠ 책상 쪽 캡쳐만;;




5시 반, 숙소에 돌아왔다. 여기 유학생들이 즐겨먹는다는 싸구려 인스턴트 미고랭(라면)을 저녁거리로 사들고 왔다. 찻잔 두개에 면을 쪼개어 넣고 포트에 끓인 물을 부어 익힌다. 다 익은 면을 접시에 건져 세 가지 액상소스를 뿌리고 가니쉬(튀긴 양파가루)도 뿌린다. 소스를 살짝 덜 넣어서 맛은 밍밍하지만, 쬐그만게 제법 배가 부르다. 음악 크게 틀어놓고 노트북 앞에서 포만감을 느끼는 기분, 썩 괜찮다.

역시나 나답게 첫날부터 무리하긴 했지만,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는 지금만큼은 완벽한 자유를 느낀다. 이 맛에 여행하는 거잖아. 지금껏 나는 무슨 여행을 한걸까. 숙소에서도, 밖에서도, 그냥 힘들기만 했던 여행이었지.
혼자라서 좋은 점? 먹고 싶을 때 먹고, 앉고 싶을 때 앉고, 가고 싶은 길 가고, 커피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거.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점점 솔직해지는 거.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는 스스로에게 꽁꽁 숨겨놨던 내 진심들, 이젠 나밖에 없으니 조금씩 조금씩 꺼내놓을 준비를 한다.  무엇보다도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웃기만 했었지. 힘들어도, 속이 다 곪아 터져도, '나? 괜찮아' 한 마디면 타인은 바로 관심을 끈다. 그땐 그게 편했다. 지금은 철저히 나와 내가 마주하는 시간, 이제서야 오길 잘했다는 기분이 든다. 조금만 더 단련하면 이젠 누구의 어떤 시선을 받는대도 아무렇지 않은, 조금 더 강한 내가 될 것 같다. 전 세계 여행자들과 온갖 이민자들이 혼재된 이 복잡한 도시, 퍼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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