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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쪄대는 더운 기운에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인 6월의 마지막 목요일 저녁, 이 더위를 식혀줄 달콤시원한 와인을 마실 기회를 얻어 압구정에 있는 와인바 라바트(Rabat)로 향했다. 강남역의 라바트는 회사에서 회식 끝나고 2~3차로 가끔 가곤 했었는데, 압구정의 라바트는 처음이다. 찾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로데오거리 후문(아치문) 앞 커피빈 지하 1층이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방은 좌식/테이블식이 있어서 예약할 때 선택할 수 있다. 미리 예약한 덕분에 안쪽의 안락한 좌식 방으로 안내받았다. 일찍 간 편인데도 1~2시간 지나자 모든 방이 다 꽉 차 있어서 놀랐다. 예약은 필수인듯.
그날 사정이 있어 DSLR를 못 가져간데다, 와인바의 특성상 조명이 거의 없어서 사진이 다 안습이다. 흑흑. 하지만 모처럼 오랜 친구들과 맛있는 와인을 앞에 두고 수다 떨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엔돌핀 상승!! 하지만 이 인간들은 그동안 뭘 하면서 살았는지 와인바는 생전 처음 와본단다. 게다가 모로코식 와인바답게 이국적인 실내 구조를 띠고 있어서 초심자에게는 완전 별천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온통 어두컴컴한데다 개별 방에 커튼까지 드리워진 묘한 분위기. 메뉴판 펴자마자 와인값을 소주병으로 환산하는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들에겐 그저 어리둥절할 밖에. 그러나 기다리던 와인이 나오자 분위기는 급 반전. :)
오늘의 주인공,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 직원분이 와인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2007년 빈티지, 품종은 모스카토 100%. 이태리산의 화이트 와인이다. 약간의 스파클링이 가미된 달콤한 와인으로,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라바트에서도 90% 이상의 만족도를 자랑한다고. 스파클링 와인을 많이 마셔본 편이 아니어서 그냥 샴페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일단 한 잔씩 받고, 소중한 나의 친구들과 함께 건배!
오옷. 그런데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가자 은은한 꽃내음이 나는듯 향기롭다. 그동안 화이트와인 마시면서 이렇게 뚜렷한 향긋함을 느껴본 적이 처음인 것 같다. 굳이 향기를 맡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달콤한 향이 풍기고, 와인을 살짝 마셔보니 당도도 참 묘하게 적절하다. 요새는 드라이한 와인에 꽃혀 있어서 '너무 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모스카토 다스티의 약한 스파클링은 오히려 맛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해줄 정도로만 살짝 느껴져서, 탄산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더욱 좋았다. 향과 맛이 참 맛있게 어우러진 화이트 와인을 만났다는 기쁨에 한 잔을 어떻게 다 마셨는지 모르겠다. 남자들의 의견도 나쁘지 않다. 여성들 뿐 아니라 남녀 두루 즐길 수 있는 부담없는 당도와 알코올 함량(5.5%)을 지니고 있어 특히 식후에 가볍게 한잔 하기 참 좋겠다. 필받았다. 바로 안주 질러주셨다.
라바트의 치즈 플래터(38,000원). 가격만 보고 조금 비싸지 않은가 했는데, 4명이서 먹고도 남을 만큼 푸짐한 양을 자랑한다. 콜비잭 치즈부터 페퍼가 든 치즈, 과일 치즈, 까망베르, 에멘탈, 스모크 등등 조금씩 고루고루 나오니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좀 특이했던 것이 함께 나온 건포도. 인위적인 당도가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포도를 바짝 말린 듯한 좀 신기한 건포도였다. 치즈와 함께 먹으면 쫄깃하게 씹는 맛이 있다. 요즘 블랙 올리브도 넘 좋아졌는데, 역시 치즈와 함께 즐기면 찰떡궁합. 그린 올리브는 좀 짰다. 블랙 올리브랑 심심한 크래커가 함께 나와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치즈에 대한 입맛은 남녀의 반응이 조금씩 다르다. 참 신기한게, 남자들은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하면서도 치즈는 달달한 맛을 좋아한다. 반면에 여자 친구는 달달한 와인과 함께 짭짤하고 담백한 치즈를 즐겨 먹더라.
모스카토 다스티는 순식간에 동이 나버리고. 안주도 나왔겠다. 기왕 멀리 나온 김에 부족할까 싶어서 한 병 더 챙겨왔던 레드와인을 개봉했다.(코르크 차지 10.000원) 얼마전 이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싼 가격에 집어온 Maureins 2004년산. 보르도 AOC와인이라 별 의심없이 샀던 와인이다. 많이 드라이한 맛인데다 알콜기가 많이 느껴져서, 잔에 따라놓고 좀 시간을 두었다 마실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던. 그래도 짭짤한 치즈의 텁텁함을 적절히 중화해줄 만한 역할은 해줬던 와인이었다.
벌써 모로코 여행을 다녀온지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멀고 먼 땅을 다시 밟을 날은 기약할 수 없지만, 대신 모로코 수도의 이름을 딴 멋진 와인바에서 이렇게 아쉬움을 달래본다. 모스카토 다스티의 달콤한 향기에 취한 그날의 저녁은 4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후딱 지나가버렸다. 와인 즐기기 제 1의 법칙은 오늘도 통했다. '어떤 와인이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와인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법칙 말이다. 그날 우리가 나눴던 얘기들은 와인 만큼이나 달콤쌉쌀했나보다. 다시 가고 싶은 와인바, 그리고 다시 맛보고 싶은 와인이 생겼다는 건 참 흐뭇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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