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거주하는 친구를 운좋게 만난 덕분에 편하게 여행을 시작하긴 했지만, 나의 일반적인 페이스대로 새로운 도시를 알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베를린 시내를 멋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행선지는 현대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 한 곳만 정하고, 특별한 일정을 정하지 않은 채 번화가 위주로 길을 익혀나갔다. 여행 준비를 따로 하지 않은 도시를 여행할 때는, 역시 서점에 가는 게 옳다. 그곳에 답이 있었다.
AM 10:00 소니 센터와 포츠다머플라츠
거대한 돔 지붕 아래 IMAX와 레스토랑, 소니 쇼핑몰 등이 모여있는 소니 센터는 다른 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현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대학생 시절 이후 12년만에 다시 찾은 독일은 그 때의 어렴풋한 기억과는 또 많이 달라져 있음이 느껴진다. 지금 유럽에서 가장 부강하고 경쟁력있는 나라 독일, 특히 예술과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 베를린에서는 이러한 독일의 현재를 엿볼 수 있다. 물론 베를린은 아직도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베를린 장벽 관련 설치물을 가장 번화한 포츠다머플라츠 역 바로 앞에 전시하고 있었다. 오늘의 여행은 천천히 이들을 둘러보면서 시작한다.
AM 11:00 Expansion of the combat zone @ Neue Nationalgalerie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멀지 않은 노이에 갤러리(신 국립미술관)가 있다. 베를린의 여러 미술관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곳으로, 현대 미술을 메인으로 다양한 전시를 진행한다. 내 관심을 끈 전시는 독일의 전후 미술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었는데, 유료 관람(8유로)이지만 기꺼이 티켓팅했고 전시는 역시나 최고였다.
사진 속 익숙한 국방색 그림;;이 유명한 앤디 워홀의 카모플라쥬(1986)다. 전시 입구에 이 작품이 걸려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현대미술을 'War'라는 주제 하에 한번에 접할 수 있었다. 요즘 반전과 세계 평화에 대한 문제가 또다시 큰 화두가 되고 있는지라, 전시를 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1968년 이후 최근까지의 독일 현대미술을 광범위하게 접할 수 있었던 이 전시에서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 - 정치적인 이슈를 담은 작품과 전후 사회 혼란을 다룬 작품-을 주로 만날 수 있었다. 사진부터 조각, 설치 미술까지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고, 특히 전시장 바닥에 앉아서 볼 수 있었던 비디오 아트가 기억에 남는다.
브루스 노먼의 작품. 서로가 이마에 총부리를 겨눈 슬픈 장면이 인상적이다.
특히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키스 헤링이나 앤디 워홀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장의 한 복판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노이에 갤러리의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도 먹었는데, 여기 식당은 비추...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베이글 샌드위치와 카페 모카의 맛은 영 형편 없었다. 유럽의 왠만한 갤러리 카페는 다 맛있었는데 여기만 제외.ㅋ
PM 2:00 티어가르텐을 지나 시내로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 중 하나인 티어가르텐은 한낮에 걸어도 청명한 공기와 고요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조용히 공원을 가로질러 조금 더 걷다 보니 어느새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베를린 콘서트하우스 앞 광장에 다다른다. 이 전까지는 사실 유럽 치고는 너무 모던해서 클래식한 거리 풍경을 만날 수 없었는데, 이곳에 오니 비로소 유럽에 와 있음을 다시금 실감한다.
PM 3:00 나만의 초콜릿을 만들어 준다! 리터 스포츠 카페
파란 유니폼의 직원이 열심히 테이블에 무언가를 쾅쾅 두들기며 무언가를 만들기에 열중이고, 사람들은 그걸 구경하며 줄을 서 있다. 저게 뭐지? 싶어서 나도 줄서서 같이 구경. 알고 보니 독일에 여행가면 한아름씩 사오는 바로 그 초콜릿, 이제는 한국의 백화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리터 스포츠'의 직영 카페였다. 카운터 앞에 줄지어 있는 다양한 토핑을 고르면, 즉석에서 녹인 초콜릿에 토핑을 부어 맞춤 초콜릿을 만들어 준다ㅋㅋ 하나 먹어볼까 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일단 패스. (나중에 공항에서 엄청나게 많이 사긴 했지만)
PM 4:00 Dussmann 서점에서 베를린을 읽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은데, 아직도 베를린을 어떻게 여행하는 게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때 눈앞에 나타난 대형 서점 Dussmann은 내게 구세주와도 같았다. 일단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곳곳에 소파가 놓여있어 한참을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베를린에 대한 책도 따로 모아놓아서 찾기 편했다.
내가 고른 두 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스타일가이드 베를린'과 또다른 베를린 여행서 두 권. 이 중에 스타일가이드는 강력 추천. 짐 무게 때문에 이 책을 사오지 않은게 지금은 너무 후회된다. 베를린을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핫한 스트리트 별로 분류하고 해당 거리에 있는 맛집과 카페, 호텔 등을 감각적으로 소개했는데 아쉬운 점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라는 것. 그래도 여기 소개된 곳을 참고해서 나머지 일정에는 좀더 풍성한 경험을 채울 수 있었다.
PM 7:00 새로 산 CD 들으며 맥주 한 잔
런던에서부터 포스터 보고 설레발치던 잭슨느님의 신보 Xscape, 독일에는 이미 발매되어 절찬리에 팔리고 있었다. 서점에서 발견하고 바로 사고, 프린스의 싱글도 저렴하게 같이 득템. 책은 무거워서 맘대로 못 사니 CD라도 사야지 싶은 이 마음.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에 넣고 아이튠즈로 음원까지 추출해가면서 감상 시작!
숙소 옆 구멍가게에서 한 병 사온 쉐퍼호퍼 헤페바이젠, 그리고 두 장의 CD와 함께 오늘은 조금 일찌감치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다시 베를리너 친구를 만나 이 도시를 더 깊숙히 들여다 볼 참이니, 오늘은 너무 욕심내지 말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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