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베르거 호텔에서 시작하는 베를린 여행은 아무런 가이드북이나 일정 없이도 물 흐르듯 이어진다. 호텔 로비에서 매일 색다른 투어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얼터너티브 투어는 관광지 대신 아트와 그래피티를 위주로 도시의 뒷면을 마치 보물찾기하듯 속속들이 돌아본다. 저녁에는 베를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친구 부부의 집에 초대받아,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베를린에서의 또 하루.
PM 12:30 Alternative Berlin Free Tour
매일 12시 반, 미셸베르거 호텔 로비로 나가면 "얼터너티브 베를린 프리 투어"라는 멋스런 미팅 포인트에서 색다른 베를린 투어가 시작된다. 아침식사와 미팅을 마친 후, 시간을 맞춰 로비에 가니 벌써 네다섯 명의 여행자들이 투어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가이드인 영국인 남자분이 인사를 건네며 다가와 인원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얼터너티브 투어는 베를린의 흔한 관광지 대신 현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트리트 아트와 그래피티, 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이드에게 직접 들으며 돌아다니는 3시간 가량의 프로그램이다. 투어는 영어로 이루어지며 "Free"가 아닌 도네이션으로, 투어가 끝난 후 원하는 만큼 가이드비를 주면 된다. 보통 5유로 정도 주면 무난.
아일랜드 출신으로 베를린의 아트에 반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투어 가이드는, 왠지 허름한(후리한?ㅋㅋ) 차림과 강한 아일랜드 억양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미셸베르거에서 대여섯 명의 사람이 모이자 "다음 미팅 포인트가 한 곳 더 있으니 모여서 같이 가자"며 10명이 채워져야 투어가 시작된다고 했다. 호텔 맞은 편의 "플러스 호스텔" 로비에도 이 투어의 참가자 몇 명이 기다리고 있다. 덕분에 플러스 호스텔도 슬쩍 구경하게 되었는데, 무슨 호스텔 로비가 왠만한 호텔 로비 뺨치게 멋지다. 역시 베를린...ㅠ
오늘의 투어 참가자는 총 10명으로, 모두 유럽과 미주 지역(미국, 캐나다)에서 왔고 오로지 나만 동양인....그래서인지 다들 첫 만남에도 쉽게 친해지는데 내게는 잘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영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였겠지. 먼저 다가가지 않은 내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불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투어는 처음에는 도보로, 나중에는 지하철로 천천히 확장해 나아가는 방식이다. 먼저 천천히 걸어서 몇 군데의 그래피티와 이야기를 들은 후, 미셸베르거 건너편에 있는 어반 스프리(Urban Spree)로 향했다. 갤러리와 아틀리에, 그리고 수많은 스트릿 아트로 이루어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막상 겉에서 보기에는 버려진 공터같은 분위기여서 혼자서 그냥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역시 투어로 와서 설명도 듣고 중요한 아티스트 별로 천천히 돌아보는 점은 참 좋았다.
물론 예술의 도시인 베를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길거리 미술을 만날 수 있지만, 어반 스프리 내에 있는 작품들은 베를린에서 상당히 유명한 스트릿 아트 작가들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단순한 그래피티와는 그림의 질이나 수준이 달랐고 완성도가 높아서 깜짝 놀랐다. 또한 어반 스프리는 단순한 야외 갤러리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전시와 공연도 많이 하기 때문에, 투어를 통해서 맛배기로 둘러보고 나중에 마음에 들면 다시 와서 제대로 즐겨보면 될 듯.
가이드 님이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 사실 억양이 강해서 알아듣기가 좀 힘들...
지루한 관광지, 그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 중 하나인 알렉산더플라츠가 다음 행선지였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얼터너티브 투어에서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시죠? 주변을 둘러보세요. 지루한 펍과 레스토랑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뒤에 뭐가 있을 지, 여러분은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라며 도시의 역사를 짧게 설명한 후 뒷골목으로 향했다.
Rosenthaler Straße에 들어서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말끔하게 정돈된 관광지는 사라지고, 바닥부터 높은 건물의 외벽까지 온통 그래피티로 가득찬 스트리트 아트 그 자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이드는 간단한 설명 후 30분간 자유롭게 돌아보라며 잠깐의 촬영 시간을 주었다.
Urban Spree에서 본 그림들이 '작품'에 가까운 회화가 많았다면, 이곳의 그림은 그야말로 베를린의 자유분방한 예술 정신을 그대로 담은 그래피티에 가깝다. 특히나 이 골목에는 상징적인 숍인 Stokx Shop이 가장 눈에 띄는데, 옷과 잡화를 팔며 멀쩡히 영업을 하고 있긴 한데, 건물 입구부터 들어서는 복도까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ㅋㅋㅋ 여기서부터는 조금씩 투어에 참가한 이들과 말문을 트기 시작. 저마다 다른 나라에서 왔다지만 이곳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모두 같기에..
이게 뭐야ㅋㅋㅋㅋㅋㅋ 이때부터 유럽 여자애들은 이곳의 계단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모두 멘붕에 빠졌다.... 태어나서 이런 혼돈의 예술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듯 흥분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나도 그녀들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게 뭐냐는 투의 제스처로 화답하기 바쁘다.
어느덧 투어가 반 이상 진행되고 한 로컬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며 자리를 잡을 무렵, 나는 아쉽지만 가이드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건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사실 같이 점심도 먹으며 친해지고 끝까지 마무리를 할까도 했지만, 여기서 다시 자유여행을 하는 게 내 스타일에 맞을 것 같았다. 투어에서 빠져나와 베를린의 번화한 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버섯을 하나하나 닦으며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애처가 남편ㅋㅋ
PM 5:00 베프가 준비해준 따뜻한 한식 만찬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대학 졸업 이후까지 붙어다니던, 내게는 하나 뿐인 친구가 있다. 나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비슷한 점이 많은 그녀는 예술가적 기질이 강하고 꿈도 너무나 컸고, 또 한국보다 외국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던 그녀가 음악을 전공한 후 결국 베를린 행을 택했고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평생지기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녀가 3년 전 베를린으로 시집가고 나서, 우리의 오랜 인연은 사소한 이유로 잠시 멈춰야만 했다. 하지만 역시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는 가 보다. 베를린에 도착한 첫 날 기적적으로 연락이 닿았고, 여행 내내 그녀와 오랜 수다를 떨며 회포를 풀었고, 드디어 투어를 마치고 그녀의 집에 찾아가기로 한 시간이다.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평화로운 교외의 예쁜 집이다.
이날 저녁 나를 위해 준비해준 따뜻한 한식 만찬은 너무나 기억에 남는다. 내가 런던에서 베를린까지 유럽 일정이 이어진 것을 감안해 특별히 삼겹살과 비빔냉면, 겉절이, 북어국에 각종 밑반찬까지 꼼꼼히 준비한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사실 20년 넘게 그녀와 알면서도 서로에게 밥상을 차려줄 기회는 없었으니까. 남편 크리스는 갑자기 들이닥친 나의 호탕한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지만ㅋㅋ 식사 후 수줍게 내 앞에 내민 에이핑크와 걸스데이 CD.....얼마 전 한국에 와서 득템했다며 자랑하는 그녀의 남편 덕분에 더욱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저녁이었다. 만삭이던 그녀는 지금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고, 다시 베를린에 가서 그녀의 아들을 만날 기회만 기다리는 중. 난 언제 다시 베를린에 가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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