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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미디어

2024 EBS 다큐 페스티벌 6편 감상 후기 - 20대 여성, 그리고 중국

by nonie 202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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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놓친게 아쉬워서, 이번 EIDF는 꽤 열심히 봤다. 특히 고양시 찬스로 벨라시타에서 무료로 극장판을 관람하고 감독들의 비하인드 토크까지 볼 수 있어서 정말 너무 좋았다. 극장이든 티비든 본 걸 적어놓지 않으면 금새 잊혀지니, 짧게라도 기록해둔다. 서로 연관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같이 정리해 두기로.


 

벨라시타에서 관람한 다큐 토크.


[극장] 퀸의 뜨개질 , [TV] 성덕
두 작품은 20대 여성 감독의 작품이어서인지, 연이어 보면서 큰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둘다 자기 서사를 기반으로 한 다큐이다 보니, 관객이 해당 주제에 당사자성을 가졌는지의 여부에 따라 메시지가 와닿는 정도가 천지차이로 다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연출 면에서는 확실히 퀸의 뜨개질 쪽이 기발했고, 뜨개질이라는 소재로 자기 서사를 풀어낸 방법도 매우 신선했다. 다만 젠더 주제 자체가 보편성을 가진 게 아니다보니 메시지의 크기는 타 다큐들에 비해 작게 느껴졌다. 반면 성덕의 경우 나도 한평생 끊임없이 누군가의 팬이었기에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주제였지만,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연출은 집중하기 어려웠다.


 

 
번외로, 극장 다녀와서 퀸 감독 인터뷰가 실린 유튜브 채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채널은 2030 여성의 보편 정서 중 하나의 맥락을 읽는 데 참고가 됐다. 세상의 속도를 신경쓰지 말고 나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는 메시지가 20대의 어려운 현실을 관통하며 먹혀드는 주제인 듯 한데, 이 방식은 그동안 반복되어 왔던 청년 한정 지식 비즈니스 모델이다. 언뜻 공익적인 듯한 이 메시지도 누군가에겐 ’콘텐츠'(밥줄)이며, 이를 따르는 순진한 청년들은 수 년 후에는 뒤로 처져갈 것이다. 물론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나왔더니 ‘잉여’가 되는 사회 시스템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지만, 같은 처지의 청년이 이를 콘텐츠화한 메시지가 스스로를 전업 유튜버로 등극시키는 것 외에 동년배 독자들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 건지 궁금하다. 이미 청년 잉여 문제를 자기 커리어로 만들어 방송인으로 진출했던 사례가 있고.
 
사실 내 여행 커리어 교육이나 유튜브 채널에서 겨냥했던 메인 소비자 타겟은 이 계층이었는데, 이젠 내 정서나 메시지가 이 세대와 교류하기엔 멀어졌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적어도 내 주변의 후배 여성들에게는, ‘너무 애쓰지 말고 살살 살아라’와 같은 조언을 해주고 싶지 않다. 20~30대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40대부터는 삶의 질감과 행복도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빡세게 살라는게 아니라, 치열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야만 만족스럽게 살아남을 수 있더라고. 그래서 이번에 본 20대 감독들의 '자기 서사' 다큐도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며 감상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는 있으니까. 
 


[TV] 늑대와 함께, [TV] 집을 잃은 소녀
두 다큐의 공통점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러시아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지만, 다루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먼저 ‘늑대와 함께’는 프랑스의 사진가와 화가가 핀란드-러시아 국경 지대에서 늑대를 기다리며 관찰하는 자연 다큐다. 숨죽이고 늑대를 기다리고, 홀연히 나타나는 늑대와 야생 동물의 생생한 모습에는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난 엉뚱하게도 이 다큐를 보며, 여름과 가을이라는 두 계절에 걸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두막에서 늑대만 관찰해도 생계에 지장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유럽인들의 직업적 형편(?)이 부럽고도 궁금했다. 한국에서 같은 내용의 다큐를 만들었다면, 이 두 예술가의 관찰자적 시선이 굳이 이 다큐에 포함될까? 싶은 것이다. 그냥 공영 방송 특집 다큐처럼 냅다 동물만 찍어올 것 같은데 말이다.

‘집을 잃은 소녀’는 짧은 미니 다큐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말 그대로 ‘집을 잃고’ 조국을 떠나 독일로 이주한 체조 선수 소녀의 이야기다. 전쟁 한 달 전에 체조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순간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은걸까 싶으면서, 역시 다큐는 정말 어려운 작업임을 느낀다. 아울러 일상의 행복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전쟁 장면이 없이도 그릴 수 있다는 게 다큐의 묘미이지 않을까.


 

 

[극장] 어둠이 끝날 무렵, [TV] 집으로 가는 기차
올해 다큐 축제 통틀어 가장 인상깊게 본 두 다큐다. 일단 둘 다 중국을 무대로 한 다큐라는 점에서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어둠이 끝날 무렵’은 지금의 중국을 담고 있다. 스촨성의 대도시 청두에서, 밤이 되면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펑키 타운’이라는 바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실 청두가 서브컬처의 중심지라는 건 여러 경로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진보적인 도시로 그려질 줄이야. 그래서인지 미국인인 감독은 토크 도중에 이 다큐를 서구에 처음 소개했을 때, ‘청두를 홍보(promote)하는 영상으로 이보다 훌륭한 콘텐츠가 없다는 평을 들었다’고 털어 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이 다큐에 등장하는 주요 실존 인물들은 대도시 속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된 존재들이며, 하루하루의 고단함을 펑키 타운에서 풀고 서로 위로한다. 하지만 지하철 공사 재개발로 펑키 타운은 사라졌고, 뿔뿔히 흩어져 개별화된 인물들이 반짝반짝한 새 지하철에서 각자 이동하는 마지막 장면은 지금의 중국을 너무 잘 보여준다.
 
 
 

 

‘집으로 가는 기차’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후 즈음에 촬영한 다큐로, 이제 막 세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당시의 중국과 그 빠른 성장속 어두운 이면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농민공’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 다큐의 주인공 가족도 도시와 농촌으로 갈라져 서서히 파괴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촬영 기간 자체도 엄청 길었을 것 같고, 마지막에 딸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소리치는 장면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아, 이게 진짜 다큐다 싶은 작품을 늦게나마 만났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메시지를 가진 여행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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