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밤에 더욱 아름다워지는 도시다. 현지인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 덕에 여행자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멋진 나이트라이프를 단 하룻 저녁에 누릴 수 있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스카이바에서의 화려한 야경부터 클락키에서 내다 보이는 유명한 야경, 현지 젊은이로 가득한 펍과 바 순례까지 한 방에 끝낸, 싱가포르의 꿈같은 시간.

 






PM 3:00 @Sofitel So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어렵사리 차이나타운을 다녀오자, 현지인 친구와의 약속이 어느덧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세 나라를 돌아봐야 하는 3주의 기나긴 일정, 일이 아닌 개인적으로 누굴 만날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쁜 옷도 신발도 챙겨오지 못한데다 현지 쇼핑도 실패, 애꿎은 여행가방만 자꾸 뒤져본다. 겨우 흰 블라우스 하나를 발굴해 냈는데, 짐가방에 하도 쳐박혀 있던 거라 사정없이 구겨져 있다. 호텔 옷장에서 다리미 받침대를 꺼내 서툴게 다림질을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이 나이 먹도록 다림질 하나 제대로 못 배운, 헛똑똑이같은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순간.

메이크업도 머리도, 집에서 하는 것 만큼 충분한 도구가 없다보니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 다급해진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싱가포르는 여행 중에 의외로 드레스업을 할 일이 많은 나라다. 스카이바나 호텔, 고급 레스토랑에선 어느 정도의 격식을 차린 옷차림을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더라. 



PM 5:30 @ City Hall

호텔이 있는 래플즈 플레이스 역에서 약속 장소인 시티홀 역은 엄청 가까운 거리였지만, 기껏 차려입고 길을 헤매거나 늦을까봐 택시를 불렀다. 택시비만큼 콜비가 나온다는 사실은 내릴 때서야 알았고...; 

지하철 개찰구가 여러 곳으로 나눠진 한국의 지하철역과 달리, 싱가포르는 개찰구가 하나뿐이어서 누군가와 만나기엔 좋은 장소였다. 그래도 와이파이가 없으면 통화나 인터넷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서(그냥 유심쓸 걸, 내내 고생했다) 혹시 길이 엇갈릴까봐 내심 초조했다. 그런데 그때...


'Hello?'


3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개찰구 중앙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동안 페북으로 간간히 안부를 전하긴 했지만, 3년 전 호텔에서 나를 체크인해주던 호기심 많은 청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어느덧 신사적인 매너를 갖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커리어를 호텔에서 카지노로 전환한 그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 했다. 사실상 친구로서는 처음 만난 데다 외국인이라 솔직히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처음 인사할 때부터 식당을 함께 찾아 헤매는 시간이 마치 옆집 친구처럼 편했다. 호텔리어로 오래 일했던 그답게,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내게 뭘 먹고 싶냐고 계속 물었지만, 래플즈 시티 지하의 수많은 식당 중에 어딜 가야 할지 선뜻 선택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익숙한 이름, 딘타이펑을 발견! 중국계 싱가포르인인 그에게도 익숙한 곳이라서 결정. 그런데 내가 아는 딘타이펑 요리라곤 샤오롱빠오와 계란볶음밥 뿐이라, 주문은 그에게 맡겼더니 순식간에 한자메뉴를 스캔한 후 능숙한 중국어로 갖가지 음식을 잔뜩 시킨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사이인지라, 서로의 문화나 취향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인답지 않게) 영어를 잘한다는 둥, 싱가포르 남자들이 혹시 길가다가 귀찮게 하지 않냐는 둥ㅋㅋㅋㅋ 매너성 칭찬도 잊지 않는다. 최근 한국 여성이 싱가포르에서 인기가 많은 추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은 누군가가 지나가면 옷차림이나 피부색을 보며 어느 인종인지 맞추는 걸 되게 좋아한다. 아마도 그들에겐 한국 여성의 어떤 Typical한 이미지가 고정적으로 있는 듯 했다. 이런저런 미디어의 영향이겠지.  









PM 8:00 @ New Asia Bar

꼼꼼한 테이블 세팅 습관부터 알아봤지만 음식을 먹을 때도 가급적 남기지 않으려는 그는, 다소 많이 주문했다 싶었던 요리를 결국 깨끗히 비운다. 1년에 며칠 없는 귀중한 휴가를 내게 내준 감사의 표시로 식사를 대접했더니, 그는 미안했던지 빨리 다음 코스로 발길을 재촉했다. 처음 약속 잡을 때부터 내게 꼭 보여주고 싶다던, 70층의 야경이었다. 손꼽히는 특급 호텔, 스위소텔 스탬포드의 엘리베이터는 단 몇 초만에 우리를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려다 놓았다.


평소 좋아하는 모히토를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같은 음료를 하나 더 주문한다. 크게 울려퍼지는 음악 때문인지, 의자에 앉은 내 옆에 다가와 서서 대화를 나누는 그의 표정은 무척 밝아 보였다. 싱가포르는 무척 작은 도시국가여서, 로컬끼리는 삶이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얘기도 많이들 한다. 일을 끝내고 어딘가로 놀러가면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 정도로 번화가도 나이트라이프 장소도 한정적이다. 내가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한 건 물론 실례였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그에게는 나의 등장이 나름의 작은 일탈일 수도 있었으리라.








70층의 야경은 역시 황홀했다. 비현실적으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이곳의 야경은, 최근 급격하게 변화 중인 싱가포르의 스카이라인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하지만 야경에 흠뻑 취한 나와는 달리, 그의 머릿 속은 벌써 다음 장소를 물색 중인 듯 했다. 








PM 9:00 @ CBD

복잡한 고가도로와 고층빌딩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도심 한 복판을 걸어서 이동하다 보니, 현지인인 그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방황 끝에 찾아낸, 선텍 시티 근처의 독일식 펍은 로컬 젊은이로 바글바글했다. 평소 페북에 맥주 사진을 많이 올리는(...) 나를 배려해 찾아낸 맛집이었다. 밀맥주를 좋아하는 나는 바이젠, 강한 맛과 향을 즐긴다는 그는 샘플러 2종을 주문했다. 앉자마자 진지하게 메뉴를 고르는 그는, 되도록 나와 다른 메뉴를 시켜서 자기 것을 맛볼 수 있도록 권했다. 여행 컨텐츠를 만드는 내 직업적 특성을 이해하는 배려이기도 해서, 매번 고마웠다. 









이때 갑자기 바 앞쪽이 부산해지더니 여성 보컬 두 명이 무대에서 라이브를 시작한다. 근데 하필 선곡이ㅋㅋㅋ Sixpence none the richer의 Kiss me 같은 노래를 바로 눈 앞에서 불러주니 뭔가 민망하다 젠장...우리 테이블 빼곤 다 남탕이었단 말이다....하아.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









PM 10:00~ 오차드, 그리고 클락키

어렵게 찾아간 브로이하우스인데, 한 잔을 비우자마자 또 다른 펍을 가자며 나를 안내한 곳은 오차드로드였다. 밤이 되자 서머셋 쇼핑거리 뒷편이 낮과는 완전 딴판으로 변신하더라. 모든 식당이 노천에 테이블을 깔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아까와 비슷한 컨셉의 독일식 펍에 자리를 잡고, 또 그렇게 한 잔을 비웠다. 싱가포르의 술값은 무진장 비싸다. 물가도 비싼데 주류엔 택스까지 붙어서 500~700ml 맥주 한 잔에 15,000원 이상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옮겨다니며 먹는 게 그쪽 문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난 밤잠이 많은 스타일이라, 술은 취하지 않았지만 계속 여기저기 다니기엔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시작이고 또 어딜 갈지 고민 중이란다. 넌지시 피곤하다고 얘기하니, 클락키를 따라 걸어서 멀라이언 상까지만 보여 주겠다고 해서 OK. 사실 싱가포르에 두 번이나 오면서도 클락키 쪽은 도저히 혼자 갈 용기가 없어서 패스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다. 클락키는 한국 관광객들이 크랩이나 술 한잔 하러 오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란한 몇몇 클럽을 비롯해 강변에 펼쳐진 수많은 술집들이 새벽에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불야성이었다. 








어느덧 도착한 멀라이언 상 앞. 아직도 술이 부족하다며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대롱대롱 들고, 싱가포르의 가장 유명한 마리나베이 앞 야경을 감상할 차례다. 로컬이어서 멀라이언이 처음이라는 그에게도, 여행자여서 멀라이언이 처음인 내게도, 그 순간은 특별했던 것 같다. 하룻 저녁에 싱가포르 최고의 나이트 스팟을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날 들렀던 모든 바와 펍은 개정판으로 지금 열심히 작업 중인 '히치하이커 싱가포르 2015'에 소상히 담아내는 걸로. 내년 초 전자책 출간 개봉박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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