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그릴라 시드니의 마케팅 매니저인 제시카에게 "평소에 자주 가는 쇼핑 스트릿이 어디에요?"라고 물으니, 호주 로컬인 그녀가 망설임없이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라고 답한다. 한국의 가이드북에는 그닥 대서특필되지 않는 곳이지만, 시드니의 로컬 정보에는 빠짐없이 꼽히는 장소다. 그런데, 쇼핑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나간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놀랍게도 내가 발견한 것은 수많은 작은 서점들과 아름다운 카페였다. 








시드니 젊은이들의 즐겨찾기, 옥스퍼드 스트리트

옥스퍼드 스트리트는 하이드 파크 너머에서 시작하는, 한적하고 긴 거리다. 이 거리가 있는 달링허스트는 로컬 젊은이들의 트렌디하고 자유로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관광지와 쇼핑몰이 몰려있는 대로변에서 다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 따로 시간내서 가기는 애매하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여행자보다는 편한 복장의 로컬들이 더 많았고, 그들을 위한 작은 의류 숍과 카페, 다국적 레스토랑 등이 길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녀의 북 셀렉트를 엿보는 공간, Beautiful Pages

하지만 옥스퍼드 스트릿의 첫인상은 다소 쇠퇴해가는 쇼핑 거리였다. 고만고만한 보세 가게나 심지어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아서 다음 발걸음의 방향을 살짝 망설일 무렵,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디스플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나온 킨포크와 모노클 가이드를 중심으로 감각적인 손길이 닿은 디자인 서적들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한참을 바라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 이럴수가. 작은 천국이 펼쳐진다.









지금껏 산발적으로 이나라 저나라 다니며 하나씩 발견해 왔던, 전 세계의 아름다운 디자인 잡지와 서적들이 이 크지 않은 공간에 섬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조용히 정리 중이던, 주인장으로 보이는 예쁜 여성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돕는다. 


로컬 매거진인 Fete의 최신호와 디자인 다이어리 한권을 집어 계산대에 놓자, "오, Fete 읽어 보셨어요? Frankie도 신간이 나왔는데, 같이 보셔도 좋아요. 이 다이어리는 크리스마스 포장을 해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책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은 말에서, 그녀가 직접 책을 셀렉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 여행을 왔어요. 서점이 너무나 아름답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홈페이지 주소가 씌인 엽서를 쇼핑백에 스테이플러로 달아주며, 국제배송을 곧 시작할 거라며 미소지었다. 그녀의 허락을 받아 사진 몇 장을 남긴 후, 숍을 나왔다. 


뷰티풀 페이지의 센스 넘치는 셀렉션을 엿보고 싶다면 페이스북에 방문해 보길. 여기 클릭!







아리엘 북셀러 Ariel Booksellers를 지나..

뷰티풀 페이지에서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아리엘 북셀러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옥스퍼드 스트리트가 단순한 쇼핑 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무엇을 볼 것인가에 따라 관점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작은 서점들이 밀집된 보물같은 거리였다. 서너 집 건너 하나씩 책방이 있는 도시, 시드니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중심가에서도 엘리자베스 스트릿에 중고 서점을 하나 발견해두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서점이 많은 거리는 처음 만났다. 








아리엘 북셀러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동네 서점처럼 보이지만, 한 바퀴 돌아보니 역시 나름의 개성이 있다. 역시 잘 셀렉된 책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문구 제품이나 디자인 수입 소품(주로 영국산)을 좀더 많이 갖춰놓고 있다. 이 거리의 서점들은 모두 느긋하면서도 평화롭다.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며 멍때려도 누구 하나 방해하지 않는, 천국같은 분위기가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들의 세상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골목에서 마시는 커피, 그리고 1$의 책

서점 구경으로 넋이 반쯤 나가있을 무렵, 작은 골목을 만났다. 아름다운 벽화가 펼쳐진 골목 사이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느긋하게 차 한 잔과 책을 읽는 그들. 1$짜리 중고책이 담긴 바구니와, 그 책들을 쌓아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커피 향기에 마지막 정신줄까지 놓을 즈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테이블 한 켠에 앉아 있었다.








진하게 뽑은 롱블랙과 달콤한 아몬드 쇼트케익 한 조각.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오지 않았다면 내 여행은 어땠을까 싶다. 


한참을, 한숨을 내리깔며 커피를 마셨다. 이 집 커피도 역시, 최고였다. 내일이면 멜버른으로 가야 하는데, 시드니의 진짜 모습은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기 시작한 셈이다. 여행이 원래 다 그렇지 뭐.







3층 서점, Berkelouw Books & Cafe 1812

자전거에 인심 좋게 매달려 있는 프리 와이파이 문구를 보니, 이번 서점도 내공이 만만치는 않겠구나 싶다. 무슨 서점이 길 건너마다 하나씩 있는 건지...게다가 그 모든 서점들이 다들 개성도 컨셉도 어찌나 뚜렷하신지들. 일단, 들어가보자. 









버켈로 서점은 총 3층인데, 1층은 여느 서점과 비슷하지만 2층부터는 로컬들의 아지트같은 카페, 그리고 3층은 빈티지 중고 도서만을 집중적으로 모아놓은 중고 서점이었다. 책과 서점, 도서관 덕후인 내게 버켈로 서점은 카운터펀치을 맞은 듯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다락방같은 3층에 마치 도서관처럼 진열된 서가를 만났을 땐, 내 남은 일정을 이 서점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중고 서가도 책을 마구잡이로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분야 별로 정확하게 분류되어 있어서 원하는 종류의 책을 찾기 쉬웠다. 여행서 쪽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Hotels & More 시리즈...수 년 전 타셴에서 발행한 책인데, 유럽 대도시의 주요 호텔을 중심으로 여행지를 추천하는 멋진 부티크 여행서다. 내가 작년에 기획했던 단행본 컨셉트와도 일치해서 책을 꼭 사왔어야 했는데, 멜버른 이동 일정 때문에 이 무거운 책을 차마 못 사고 온게 지금도 후회된다. 


내가 호주에 온 건, 매거진 프랭키에서 발견한 호주만의 독특한 감성을 더 깊게 탐구하고 싶어서였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시드니를 겉돌고 있다는 생각에 이유모를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작은 서점이 가득한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발견한 순간, 호주여행을 시작한 이유를 일깨울 수 있었다. 책향기 가득한 그 거리에서의 느릿한 산책은, 시드니 여행에서 가장 소중하게 기억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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