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ice가 오프라에 출연하고 미국에 데뷔앨범을 냈던 지난 2009년 6월, 나는 동남아시아 음악의 무서운 약진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1년 4월, 드디어 한국 TV에서 필리핀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영했다. TVN이 다큐 전문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아시안 팝 4부작> 중 2부인 "세계를 홀린 피노이" 편이다. 그동안 미국 진출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같은 아시아인인 섀리스의 엄청난 성공을 외면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던가보다. (하지만 섀리스가 스타킹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내 생각엔 국내에선 그녀의 성공이 큰 이슈가 되지 못했을 거라 본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끼는 점이 참 많아서 몇자 적어본다.
섀리스는 지금 미국 팝음악계의 핫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고의 미드 Glee 2시즌에 출연 중.
섀리스 미국진출 성공의 본질은 '스토리텔링'이다. 그녀가 필리핀 최고의 소녀 보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대대적인 홍보를 때리며 데뷔했다면 절대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시아계를 배척하는 미국에서 보아나 원더걸스, 세븐의 미국 진출 접근이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튜브 동영상 → 오프라 윈프리 → 데이빗 포스터 → 데뷔로 이어진 일련의 미디어 노출 단계에서는 중간중간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살면서 밥벌이를 위해 노래를 해야 했던" 불쌍한 필리피노 천재 소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깊이 관여한다. 그녀는 자전 스토리를 통해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노래 실력은 이를 든든히 뒷받침했다. 그녀는 어느정도 영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외국인이라는 거리감을 조금 더 줄일 수 있었다.
그녀의 프로듀서이자 대부(Godfather)를 자처한 데이빗 포스터는 "필리핀에는 아직도 제 2의 섀리스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나는 그들을 찾고 있으며, 곧 대대적인 아시아 오디션을 통해 숨겨진 인재를 찾아 나설 것이다"라며 무서운 야심을 밝혔다. 다큐에서 보여진 필리피노의 음악적 재능과 열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기타와 노래를 배우는 것이 일상적인 그들에게 좋은 가수가 많은 이유를 묻자 "타고난 귀(Good Ear)"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스타를 꿈꾸면서도 정작 기본적인 음정과 박자를 일부러 '배워야만'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필리피노들은 노래를 부르기 전에 기타부터 배운다. 이러한 그들의 타고난 재능은 로컬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잘 드러난다.
Angeline Quinto의 데뷔앨범 커버. 4월에 갓 출시된 신작.
지난 2011년 2월 20일, 필리핀에서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유행인 TV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파워(Star Power)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여가수 Angeline Quinto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자신의 우상인 필리핀의 국민가수 '레진 벨라스케즈'를 매 회 완벽하게 모창하며 대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레진의 음역대가 워낙 높기 때문에 그녀를 모창할 수 있는 수준만 돼도 대단한 거라 본다. 게다가 그녀의 나이 이제 20살, 아직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녀가 대회에서 불렀던 라이브는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아직 프로페셔널하진 않지만 한국 오디션 프로에 나오는 출연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이 너무 쪽팔리고 오그라든다. 노래를 못부르는 민족임을 대놓고 인증하는 것 같다. 게다가 TVN 다큐에 의하면 많은 필리피노가 자국 가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라이브 무대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올리는 일에 앞장선다고 한다. 애국심도 애국심이지만 진짜 '음악'에 대한 국민적 열정, 우리와 너무 다르고 부럽다. 앞으로 많은 동남아시아권 가수들이 글로벌 팝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는 케이스가 더 많아지리라 본다.
Laarni Lozada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Laarni Lozada 역시 지난 2008년 Pinoy Dream Academy 시즌 2에서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실력파 보컬리스트다. 그녀도 이제 25살인데다 이 오디션을 주관했던 방송사 ABS-CBN의 매니지먼트인 Star Magic에 소속, 전미 월드투어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Laarni Lozada의 쩌는 노래실력은 아래에.
Amber Alejo Rowley Davis
한편 현재 미국 진출의 가능성이 높은 가수를 꼽자면 앰버 데이비스(Amber Davis)가 있다. 그녀는 애리조나 출신의 Filipino-American인데다 '맨디 무어'를 연상시키는 비주얼도 뛰어나다. 사실 2007년 필리핀으로 건너와 "Back Into You" 등의 싱글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결혼 등으로 활동이 주춤했었다. 그런데 최근 재기를 준비해 곧 인터내셔널 앨범이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보컬리스트라기 보다는 댄스와 보컬을 겸비한 엔터테이너 형 가수다.
Sylvia Ratonel의 데뷔 앨범.
지금까지가 모두 필리핀 가수였다면, 마지막으로 이번 싱가포르 여행에서 건진 유일한 음반이기도 한, Sylvia Ratonel을 소개한다. Sylvia Ratonel 역시 2009년 싱가포르 아이돌 시즌 3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오디션 출신이다. 인터넷 상에서 거의 모든 음원을 구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음원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ㅜㅜ 싱가포르 HMV 가서 겨우 샀다. 그녀의 데뷔 앨범 역시 전곡 영어로 녹음되었고, 최근 세계적인 트렌드인 레트로 팝 장르에 비교적 충실하다. 그녀의 음반 리뷰는 추후 자세히 하기로 하고.
지금 한국의 음악시장은 한류라는 거대한 거품에 묻혀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는 전혀 동떨어진 쪽으로 흘러가고 있고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 진출은 여전히 우리에게 염원한 숙제다. Far East Movement의 빌보드 1위를 두고 한국인 1위라며 호들갑떠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FEM의 경우도 한국계 미국인이 2명 있긴 하지만 필리피노 DJ Virman의 음악적 역할이 작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엄연한 '미국인'이다.
제발 한국에도 '스타' 말고 스토리가 있는 '가수'가 많이 나와서 세계 시장에 선보여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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