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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비바람과 흐린 날씨에 두배로 삭막함을 느껴야만 했던 대도시 암스테르담을 뒤로 하고, 나는 여행 넷째날 헤이그에 도착해서야 진정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따뜻한 날씨, 그리고 빛바랜 듯한 옛 건물이 강가를 따라 늘어선 아름다운 풍경의 헤이그는 많은 여행자들이 칭찬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곳이었다. 작지만 알찬 볼거리가 담긴 도시 헤이그에서 보낸 3일, 그 찰나의 여유로움이 담긴 사진 몇 장.
클래식하면서도 빈티지한 센스가 넘치는 헤이그의 거리 풍경
헤이그에서 찍은 사진의 느낌이 암스테르담에서의 그것과 다른 이유는, 여기 와서야 처음으로 필름 카메라를 꺼낼 정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자유여행의 초반 며칠은 상당히 힘들다. 시차와 환경에 적응도 해야 하고 게다가 이번처럼 날씨가 안좋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여행 나흘째, 암스테르담의 악조건에 어느 정도 트레이닝을 받고 나니 헤이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비로소 '여행'을 즐기기 시작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이그에 오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화창해졌고, 한결 밝고 활기찬 표정의 거리 풍경이 날 맞아주었다. 기대했던 이곳의 호텔도 너무나 예뻐서(후기는 다음 여행기에), 지친 컨디션 속에서도 발걸음에는 한층 탄력이 붙었다.
편안한 휴식을 안겨주는 헤이그 도보 여행
한국 여행자들이 헤이그를 방문하는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헤이그 특사 기념비를 잠시 들르기 위해서다. 네덜란드 패키지 여행에는 헤이그 일정이 거의 없거나 반나절 시티 투어 정도가 전부다. 사실 헤이그에 엄청 특별한 건축물이나 대형 박물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볼거리로 따지면 암스테르담이나 로테르담 같은 대도시에 못미친다. 하지만 많은 유럽 여행자들이 헤이그를 찾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공원으로 느껴질 만큼 평화롭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이그는 단연코 '지나치는' 도시여서는 안된다. 단 며칠이라도 '묵어가는' 도시여야 한다. 그래야 헤이그의 숨겨진 소박한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예술의 숨결이 가득한 갤러리 거리를 걷다
헤이그는 작은 도시여서 중심가는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다. 행정 수도의 역할을 하는 헤이그는 비넨호프(국회의사당) 건물을 필두로 한 역사적 건축물 지역, 그리고 노천 카페로 가득한 맛집 거리, 그리고 갤러리와 골동품 샵들로 가득한 거리 등으로 길마다 테마가 적절히 나누어져 있어 취향에 맞는 도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모든 거리가 아기자기하고 예뻤지만 역시 자잘한 볼거리가 가득한 갤러리 거리는 늘 흥미롭다.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공공 디자인의 다양한 면모를 만날 수 있다면, 헤이그에서는 보다 옛스럽고 빈티지한 예술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마우릿트하우스(Mauritshois)에서 만난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오늘따라 더욱 운치있어 보이는 빨간 트램이 거리를 가로지르고, 새하얀 백조가 반짝이는 강가를 유유히 떠다니는 한가로운 헤이그에서의 오후는 꿈결같이 느릿느릿,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지나고 있다. 왠지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기가 아쉬워서, 강가 저편에 있는 마우리트하우스로 향했다. 여행 전에 우연히 본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을 만날 수 있는 작지만 알찬 헤이그 최고의 미술관이다. 영화 속 소녀로 분했던 스칼렛 요한슨의 부서질 듯한 청순함을 원작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미술관은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날아온 단체 관광객들로 가득차 있어 조용히 작품을 감상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을 지나 드디어 진주 귀걸이를 맞닥뜨린 나는 관광객들 뒤에 있던 쇼파에 앉아 기다렸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그림 앞에는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고, 오직 그림과 내가 만나는 순간도 고맙게 찾아와줬다. 역시 명작은 먼길을 찾아 온 만큼의 감동을 안겨준다. 그 느낌 그대로를 안고, 나는 미술관을 빠져나와 다시 헤이그의 따뜻한 햇살 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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