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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리얼리티 열풍의 포문을 연 American Idol로 시작된 미국의 리얼리티 난립은 10년째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국의 '나가수 현상'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지금 빌보드차트를 점점이 수놓은 'The Voice'도 끝물을 탄 오디션 쇼라고 짐작했다. 특히 4명의 멘토가 제자를 뽑아서 대결한다는 기본 포맷은 이미 한국에선 식상(?)해진지 오래다. 하지만 놀랍게도 The Voice 1시즌은 (적어도 내게는) '위탄'보다 '나가수'에 훨씬 가까웠다. 90년~2000년대 초반 미국 R&B신을 이해하고 있는 리스너라면 이 쇼에서 찡한 감동과 반가움을 적어도 서너번은 느꼈으리라.
제 2의 휘트니 휴스턴, 태럴린 램시(Tarralyn Ramsey)의 16강 탈락
지난 4월 26일 The Voice의 첫 방송이 NBC를 통해 미국 전역에 첫 방송을 탔다. "블라인드 오디션"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운 이 쇼는 4명의 팝스타 멘토가 등을 돌려앉은 채 참가자의 노래만을 먼저 듣게 된다. 이 쇼의 포문을 연 첫 참가자는 놀랍게도 테럴린 램시였다. 국내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녀는 이미 2004년 VH1의 대대적인 오디션에서 대상을 거머쥐고 화려하게 데뷔한 가수다. 테럴린의 등장이 보여주듯, 이 쇼는 신인 발굴 오디션이 아니다. 기존에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숨겨진 보컬리스트를 찾아내 슈퍼스타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나는 그녀의 데뷔 시절부터 휘트니 휴스턴을 복제한 듯 완벅한 보컬톤에 크게 주목했었다. 하지만 제 2의 휘트니라는 굴레에 갇힌 음악 커리어는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메이저 데뷔는 실패했고, 절치부심 발매한 가스펠 음반도 보컬 레인지만 내세우는 'too much'한 발성으로 완성도를 떨어뜨려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실패 요인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듯 시종일관 내지르는 창법으로 고음을 남용했고, 같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조의 경쟁자 프렌치 데이비스와의 맞대결에서 패배, 허무하게 16강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탈락에서 최근 변화하고 있는 팝신의 대세, 즉 보컬의 'Range'보다 'Tone'이 더 주목받는 현상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한국계 혼혈 디아 프램튼(Dia Frampton)의 준우승
화려한 고음을 자랑하는 테럴린의 탈락과 가장 비교되는 결과는 디아 프램튼의 준우승일 것이다. 동화책 작가로 일하던 수줍은 소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에서는 기존의 오디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순수함이 돋보였다. 보컬리스트를 뽑는 오디션에서 그녀의 승부수는 오히려 절제된 톤과 스타일이었고, 경쟁을 의식하지 않았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로 카니예 웨스트를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뮤지션적인 면모는 단숨에 그녀의 직업을 바꾸어놓기 충분했다. (그녀가 완전 아마추어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친언니와 Meg & Dia라는 록밴드로 무려 2005년부터 활동했던 인디 가수 출신이다. 하지만 오디션에서는 그 사실을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독일-한국계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포가 미국 오디션에 출몰하는 모습이야 익숙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동양인은 제대로 실력평가를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전국 투표를 하는 생방송 오디션에서 한국계로 알려진 디아 프램튼이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은, 현지 팝신에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승자 하비에르(Javier)의 인생 역전
The Voice가 오디션이 아닌 프로들의 경연인 이유는 바로 우승자 하비에르 때문이다. 내가 이 쇼에 환호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내 미니홈피의 BGM은 October Sky였는데, 바로 하비에르의 데뷔 앨범 수록곡이다. 2003년 데뷔작 'Javier'는 당시 급변하던 R&B신에서 90년대의 향수에 목말랐던 리스너에게 단비와도 같은 명반이었다. 깊이있는 보컬과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독립 레이블에서 변방의 음악 인생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위해 자신의 과거 커리어와 자존심을 버리고 리얼리티라는 초강수를 택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지금 한국의 '나는 가수다' 열풍과도 참으로 닮았다. 이제 가수가 예능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임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우승했고,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그의 음악을 멋지게 펼칠 기회가 왔다. 진심 어린 그의 목소리, 순수함이 가득 담긴 그의 미소는 The Voice 최고의 관전 포인트.
[번외] 90년대 최고의 천재 여가수 모니카의 깜짝 등장
네 명의 팝스타 멘토 중에 씨로 그린(Cee-lo Green)은 자신의 제자들을 함께 가르칠 파트너로 모니카를 모셔온다. 씨로 그린과 절친한 사이라는 모니카는 90년대 R&B 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다. 한국에는 브랜디와의 듀엣곡인 'The boy is mine'으로나 알려져 있지만, 15세의 나이에 힙합 계의 거물 퀸 라티파의 눈에 띄어 데뷔한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다. 지금도 그녀의 데뷔 앨범 Miss Thang은 후속작들이 넘어서지 못한 명반이고, Before you walk out of my life 같은 곡은 보컬 연습좀 해봤다는 이들은 한번씩은 불러봤을 것이다. The Voice에서도 씨로 그린의 제자를 가르치면서 잠깐씩 노래 시범을 보이는데, 여전히 멋진 실력에 완벽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어 반가웠다. 사실 그녀는 꾸준히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타고난 호흡 장애가 있고(예전에 내한해서 한 TV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폐를 강화하는 별도의 발성연습을 시범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팝 트렌드에 밀려 예전처럼 활발한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2008년 사생활과 앨범 준비 과정을 리얼리티 쇼로 보여준 적도 있다는데, 이번 쇼를 계기로 더욱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1 MTV Movie Awards에서 리즈 위더스푼은 "리얼리티 쇼 안 나가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제가 증명할께요!"라는 인상적인 수상소감을 남겼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잊혀져가는 실력자들은 너무도 많다. 어떤 아티스트에게 리얼리티 쇼는 음악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The Voice는 달라진 글로벌 음악신에 적응하는 가수와 그렇지 못한 가수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더욱 냉혹하고 슬프지만, 그래서 흥미롭다. 다만 2시즌에는 아델(Adele)-like 짝퉁 보컬들은 이제 그만 좀 나와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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