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직을 앞두고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바로 나의 4년 전 모습이다.
아직도 나의 2005~2006년 초반은 개운치 않은 이력으로 정리되어 있다. 음악웹진
Jamm이라는 사이트의 창업, 컨텐츠 기획 등 몇 줄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요즘 경력자 구인 조건에 보면 정규직이 아니면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는 업체도
많다. 한마디로 창업 경험이 있어도 실패했다면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전 S대기업 계열사에 면접을 볼 일이 있었는데, 한 간부급 면접관은 내 이력 중
유독 창업했던 경력만을 계속 물고 비아냥거렸다. 조직 생활이라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미국에서는 스탠퍼드를 졸업하면 창업을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카이스트를
나와도 NHN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만큼 창업에 대한 한국 내의 시각은 아직도
그리 곱지 않다. 부모들도, 주위 분들도, 이럴 때일수록 안정적인 삶을 강요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손쉽게 중견 기업의 공채에 합격해 무난한 삶을
시작하는가 했던 nonie의 첫 사회 생활,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아직 어떤
인생을 살아야할지도 모르겠고, 월급쟁이를 하더라도 뭔가 목표가 있었어야 했는데,
난생 처음 겪는 9 to 6 인생은 고3 시절보다 더 지옥이었다. 결국 난 쉽게 얻은 만큼
쉽게 포기했다. 졸업과 함께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음악웹진, Jamm의 창업이었다. 시작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당시 싸이월드의 새로운 짝퉁 블로그 서비스, '페이퍼'가 런칭되던 시점이었다.
나는 페이퍼에 평소 좋아하던 매니악한 흑인음악을 집중 소개해보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좋아서 시작했던 소일거리였다. 그런데 나만 좋아할 것
같던 음악과 그 리뷰글을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유명
음악 웹진의 필자로 있던 K군도 있었다. 그는 현재 몸담고 있는 웹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새로운 웹진의 창간을 원했다. 그는 곧 필진 겸 공동 창업을 제의해 왔고,
장차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 계열을 전공했던 나였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K군과 같은 웹진에 있던 P군도 동참, 세 명은 곧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Jamm 매거진의 초창기 디자인. 매니악한 장르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
Jamm의 기본 컨셉트는 흑인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 전문가들의 집단이다.
그들의 필력과 컨텐츠에 의존해 PV를 높이고, 그 파워를 통해 여러 가지 수익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이 시초였다. 예를 들면 중고 음반 유통이나 신인 아티스트 발굴 등이
그 예다. 필진들이 전문 매체 쪽에 글을 기고하게 할 수 있도록 중개해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중심은 컨텐츠였다. 지금의 메타 블로그와 비슷한 개념의 웹사이트를 원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전혀 순탄치가 않았다. 지금은 명확해진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특정 장르의 집단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한국 음악시장 내에서는
불가능했다. 한 마디로 시장이 너무 좁았다. 우리는 12~13명의 필진을 순식간에
모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수준높은 컨텐츠에 비해 리스너들은 수적으로는 많지만
층이 매우 얄팍했다. 시장조사 결과 흑인음악 리스너들의 대부분은 보컬리스트(혹은
연예인?;)를 꿈꾸는 실용음악 전공자나 혹은 전공 준비생들이었다. 그들이 주로 듣는
음악은 국내에 미소개된 R&B나 60~70년대 정통 흑인음악이 아니다. 세븐이나
박정현, 나얼과 같은 국내 R&B가수들이 그들의 아이콘이자 스승이었다.
두번째로 나왔던 Jamm의 메인페이지. 점차 기존 웹진과 닮아가고 있다.;;
당시에는 '흑인음악'이라는 컨셉트가 명확하게 잘못된 것인지도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외국 음악의 소개를 통해 한국 리스너들의 수준을 높여줄 수 있는
사이트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음악 시장이 디지털화되고
통신사에 존속되리라고는 그저 짐작 정도만 할 뿐이었다.
또한 4년 전만 해도 커뮤니티의 세력은 굳건했다.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는
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었다. 개인이 트래픽 비용 물어가며 웹진을 만들면 방문자가
슬슬 몰렸다가, 결국 운영 부담으로 접으면 또 뿔뿔히 흩어지던 시절이 2000년대 초반.
그다음 서서히 포털 커뮤니티가 자리잡아가던 것이 그 즈음이다. 그런데 신규 웹진을
만들어 포털 회원들을 빼오겠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부터 쉽지 않은 게임이었다.
그들을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올킬 한방이 있어야 했다. 컨텐츠로는 부족했다.
많은 고민과 시도가 거듭됐다. 사이트 디자인은 계속해서 바뀌고 엎어졌다.
다행히도 필진들은 대부분 끝까지 우리 운영진을 믿고 따라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들이다. 필진들을 위한 클럽과 블로그를 따로 운영한 덕이 컸다.
Jamm 쇼핑몰의 메인 기획.
결국 1년여에 걸친 운영진들의 시도는 아쉽게도 접어야만 했다. 변변한 사무실도 없이
온/오프라인을 오가며 힘겹게 회의를 해야만 했고, 자비를 대가며 올인을 하기에는
셋 다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각자 아르바이트도 해가면서 어떻게든 Jamm을
살려보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현실의 냉혹한 벽 앞에 부딪혔다. 물론 큰 배움의
과정이었다. 아무리 작아도 조직은 조직이었다. 재무, 기획, 운영, 홍보까지 각자의
역할은 명확했고 결코 서로에게 일을 떠넘기지 않았다. 정말 열정적으로 일을 했었다.
K군은 결국 전공을 살려 아예 다른 방향으로 취업을 했고, P군은 운좋게도 공연 기획
쪽에서 인턴을 하다가 인연이 되어 지금도 그 회사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난 Jamm을 정리한 직후 TV 출연-_-이 계기가 되어 생뚱맞게도 여행 쪽으로, 그리고
이젠 IT업계로 발을 담그게 되었지만. 참 인생이라는게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꾸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그때의 용기와 열정이 부럽고 그리워서가
아닐까 한다. 공교롭게도 최근 내가 접한 많은 조직 혹은 사람들이 혁신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지라 더 그런가보다. 2009년, 나도 다시 4년 전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려 한다. 물론 이제는 실패보다는 성공을 꿈꾸고 싶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할 일은 없으리라 믿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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