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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미디어

스리랑카의 '리즈치', 프로파간다, 그리고 관광

by nonie 2020.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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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시골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트래디셔널 미 채널.

 

 

유튜브의 '장르'가 된 리즈치, 그 후 벌어진 일

며칠 전 나의 유튜브 추천 영상에 새로운 영상이 하나 떴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성이 스리랑카 요리를 만드는 영상이었다. 인도와 스리랑카에 각별한 관심이 있는 데다 평소 전 세계 요리 채널을 굉장히 많이 구독하고 시청하는 편이라, 별 생각없이 클릭했다.

 

그런데 심상치가 않았다. 자국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식문화를 보여주는 방식, 대자연과 요리 과정이 교차하는 세밀한 촬영 등이 굉장히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렇다. 유튜브에서만 천만 구독자를 확보한 세계적인 중국 유튜버, 리즈치의 영상 화법 그대로였다.(리즈치가 누군지 모른다면 이전 글 참조) 아니라 다를까, 채널 소개를 보니 리즈치와 진소서가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명확하게 명시했고, 아예 Inspired channel로 두 채널을 연결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저 채널 구독자나 시청자의 알고리즘에도 상당히 노출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도 뜬 것일테고. 

 

채널의 주인공인 나디(Nadee)는 할머니, 남동생과 함께 스리랑카 시골에서 요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녀는 할머니를 위해 시골로 온 도시녀 리즈치처럼 어떤 '스토리텔링'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채널 소개에 밝힌 운영 목적은 다소 거창하다고 할까, 혹은 개인보다는 어떤 대의를 반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스리랑카의 식문화는 말레이와 아랍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스리랑카는 다문화 국가"와 같은 대목에서 약간 뭐랄까, 싸한 느낌이 왔다. 

 

 

 

그녀의 첫번째 영상. 지난 3월에 올라왔지만 벌써 160만 조회수를 넘어섰다. 대부분 리즈치 채널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개인 유튜버가 '국가적 과제'를 운운하는 이유

첫 업로드된 "Wooven yet edible" 영상은 매우 높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잘 기획된 채널인데, 불과 3개월 전인 2020년 3월 2일에 올라온 이 영상은 160만 뷰, 댓글만 5천 개가 넘는다. 댓글을 보니 실제로 리즈치 채널에서 연관 영상으로 떠서 들어왔다는 이들이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카피캣이라는 오명을 받느니 처음부터 'Inspired'라고 밝힌 전략이 유효했던 셈이다. 

 

그런데 댓글을 쭉 내리다가, 채널 운영자가 스리랑카 어로 단 장문의 글을 발견했다. 번역해 보고 이 채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댓글은 스리랑카 인에게 쓰는 글입니다. 현재 영상 1편 촬영에 최소 2~3일, 편집에 2일이 걸리므로 거의 일주일 내내 영상 제작에 몰두해요. 그래서 쏟아지는 댓글에 일일이 응답할 수 없습니다. 현재 시청자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인데, 이 비디오가 어느 나라에 관한 것인지 알고 싶어해요. 가능하면 조국의 이름으로 제 대신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몇몇 스리랑카 인들은 우리가 정확한 레시피를 소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스리랑카 요리를 가르치는 채널은 우리가 아니어도 많습니다. 이 채널은 음식 준비법을 가르치려고 고안한 채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훨씬 더 넓습니다. 나는 리즈치, 진소서가처럼 문화적 가치와 삶의 리듬을 보여주는 유튜브 모델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중국의 풍부한 문화적 환경과 생활 양식(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인 덕분에, 중국은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의 사랑을 받게 됐습니다. 따라서 이 채널의 목적은 요리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광범위한 국가적 과제'입니다. 앞으로 업로드할 비디오를 보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시골에서 요리하는 유튜브 채널이 '국가적 과제'를 위한 것이라고?? 물론, 개인적인 목적이 국가의 이익과 부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유튜버일 수도 있다. 또는 실제로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앞으로 받을 수도 있다. 단지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전 세계 관광산업이 이러한 콘텐츠의 영향을 상당히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과 홍보, 홍보와 선전을 구분하는 것 또한 대단히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는 관광산업에 상당히 높은 관심과 투자를 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관광청은 내가 연구했던 전 세계 관광청 중에 인플루언서 관련 지원 정책을 가진 몇 안되는 곳이다. 그리고 몇몇 호텔들은 거의 관광청의 역할 일부를 수행할 만큼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적극적이다. 한때 GDP의 15% 내외를 차지했던 스리랑카의 관광업은 각종 내전과 테러, 쓰나미 등으로 침체되어 현재는 5%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2019년의 무지막지한 테러 사건에 코로나까지 겹쳐 초토화된 스리랑카에서, 관광업의 회복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단위의 노력과는 별개로, 이러한 '리즈치 스타일'의 비디오를 통해 스리랑카에 대한 동경과 관심을 새롭게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본다. 관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영상이 잠재적 관광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관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구식인지를 역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153회에 소개된 PR과 프로파간다의 차이점. 현대의 PR 기법은 프로파간다와 함께 고도화되기도 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관광진흥 역할을 하는 콘텐츠의 탄생

리즈치는 한 달 수익이 1억원이 넘는, 걸어다니는 기업이 됐다. 럭셔리한 저택과 마세라티 차량을 소유했다는 소문이 도는 셀럽이 된 것이다.(물론 촬영은 계속 시골 집에서 한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개인의 성공만이 아니다. 중국이 어떤 돈과 자본을 투입해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중국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을 바꿔준 것이다. 전 세계에서 달리는 댓글의 대부분은 매혹적인 중국 문화와 음식 찬양 일색이다. 한 때 그녀가 김치 만드는 영상에서 김치를 연변의 전통 음식으로 표기한 것이 뒤늦게 한국에 알려지면서, 동북공정의 의도가 배후에 있는 건 아닌지 강력한 의심을 받기도 했다. 최초 채널을 만든 목적은 온라인 유통을 위한 마케팅이라는 개인적 의도임이 밝혀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큰 효과를 거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효과를 경험한 중국은 앞으로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참석한 시안 투어리즘 컨퍼런스에서도, (중국에서 접속조차 되지 않는) 외산 SNS를 이용해 이미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는 끊임없이 나왔다. 

 

한국이 BTS의 이미지를 투영해 서울을 홍보하고 영국이 해리포터 배경으로 런던을 홍보하듯, 이제 관광의 생존을 결정하는 요소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콘텐츠'다. 실제로 내가 구독하는 외국 채널 중에는 문화적 요소를 뚜렷히 드러내는 개인의 채널이 많다. 음식이나 패션 등 특정 소재를 통해 해당 국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영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핵심 콘텐츠가 빠진, 정치적 구호만 남은 선전은 그래서 무용하다. 일본의 쿨 재팬이 좋은 예다.

이제는 특정 국가와 문화를 주요 소재로 다루는 채널이 글로벌한 인기를 얻는 순간, 관광청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만드는 프로모션 비디오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콘텐츠 역시 국가간 관계와 정치적 흐름에 즉각적인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어떤 나라에 종속된 콘텐츠는 외부 위기에 대단히 취약해지고 있다. 특정 국가만 다루는 여행사, 여행상품, 여행 콘텐츠가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일례로, 거대한 일본여행 시장에 의지했던 관련 종사자들은 2019년 불매운동 직후 그 많던 소비자를 순식간에 잃었다. 중국의 경우 2019년 초만 해도 훠궈와 마라탕 열풍과 함께 중국 비인기 도시 에세이가 하나둘 출간되면서 인기를 얻는 듯 했다. 이어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2의 연변 편 논란과 리즈치의 김치 사건 이후 '동북공정'에 대한 경각심이 깨어나고, 코로나와 함께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래서 특정 문화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나 숭배를 이끌어내는 콘텐츠, 또는 그런 사람을 발견할 때마다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그 영향력이 가져오는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되기 때문인 듯 하다.

특히 중국과 일본같은 인접국은 지리적 특성상 유학을 했거나 사업적 연관이 있는 한국인의 수가 타국에 비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들 국가의 문화 콘텐츠가 자신의 이익과 직접 연관되는 한국인 중에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도록 설득하고 선전하는' 역할을 꾸준하고 정교하게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비단 유튜브만이 아니라 트위터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결국 국가나 문화에 너무 기대어 있는 콘텐츠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소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이 지점은 미디어 리터러시 관점에서도 앞으로도 꾸준히 관찰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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