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ie X Bangkok - 왓포 사원에서 느리게 흐르는 오후
나의 여행은 언제나 호텔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서서히 퍼져나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호텔의 로케이션이다. 흔히 말하는 관광의 최적 입지가 아니라, 철저히 주관적인 새로움을 선사하는 위치 말이다. 내게 가장 새로운 방콕은, 그동안 많은 이들에겐 흔했던 올드 방콕이다. 왕궁 구경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던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사원 안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다. 모든 게 다, 이번에 묵은 리바 아룬 덕분이다. 호텔에서 길만 건너면, 그 유명한 왓포 사원이다.
리버사이드 어느 골목의 팟타이
여행을 다니며 하루종일 고민하는 건 단순하다. 삼시세끼를 어디서 뭘 먹을 것이냐 하는 것 뿐이다. 구글맵을 뒤져보니 잼팩토리 근처에는 이렇다 할 식당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우버를 불러 타고, 강가를 거슬러 숙소가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리바 아룬 호텔과 왓포 사원이 있는 이 동네는 소위 말하는 백팩커들의 천지다. 이 일대는 왕궁과 사원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는데, 마치 동네 자체가 거대한 관광지인 이스탄불 구시가를 보는 듯 하다. 그래서 관광지로 개발된 역사가 오래된 방콕의 옛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풍경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리바 아룬처럼 옛 건물을 리노베이션하여 호텔과 새로운 식당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한창이다. 아주 빠른 시일내에, 이곳의 풍경은 아마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낡은 게스트하우스, 또 거기서 흘러나오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교차하는 허름한 식당들 중에서 구글맵에서 평점이 높은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 트립 어드바이저 평점도 괜찮은 모양이다. 내부는 방콕 특유의 빈티지한 느낌이 많이 묻어난다. 내부 느낌이 꽤 편안했다. 와이파이도 되고, 가격도 현지인들 먹는 가격보다는 살짝 비싼 게 딱 여행자를 상대하는 식당의 분위기가 난다. 손님은 나 말고도 한 팀 더 있었는데 중국인 자유여행자 같았다.
메뉴판에는 왠만한 태국의 보급형 식사 메뉴가 거의 다 있었다. 사실 아침에 볶은 국수를 먹었기 때문에 밥 종류로 이미 마음을 정하고 왔건만, 주인장이 '저희 집의 간판 메뉴는 팟타이에요'라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하는 수 없이 팟타이와 기본 쏨땀을 주문하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스파이시?'라고 묻길래 얼결에 예스를 외치고.
잠시 후 나온 팟타이와 쏨땀은 무척이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게 한눈에 보였다. 아침에 조식당에서 먹었던 볶음 쌀국수에는 면이 너무 불어 곤죽이 되어서 보이질 않았는데, 이곳의 팟타이는 면과 건더기가 잘 살아있고 무엇보다 소스 간이 적절했다. 듬뿍 곁들여 나오는 고춧가루와 땅콩가루 등을 잘 버무려서 먹으니 천상의 맛. 아침에 먹은 국수가 생각이 안 날 정도다. 단, 아주 매운 걸 못 먹는데 쏨땀에 든 고추가 엄청 강해서 겨우겨우 먹었다. 담엔 태국에서 호기롭게 스파이시를 외칠 때, 한 번 더 생각해야지.
늦은 오후의 왓포, 그리고 마사지
방콕에 여러 번을 왔지만, 지난 번 리바 수르야에 묵을 때 카오산 로드 일대를 잠깐 돌아본 걸 제외하면 사실상 구시가 왕궁 일대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일단 왕궁은 이번에도 시간이 없어서 패스고, 선택지는 배를 타고 왓 아룬을 가느냐, 아니면 호텔 맞은 편 왓포를 가느냐였다. 호텔 직원들은 왓 아룬을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했지만, 구글맵 상에 올라온 최신 한국어 리뷰에는 '왓 아룬이 아직 공사 중이라 철근 투성이고, 가까이서 보면 실망한다'며 만류하는 글 뿐이었다.
내 방에서 펼쳐지는 왓 아룬의 그림같은 풍경에 만족하기로 하고, 방콕에서의 남은 시간은 왓포에서 보내기로 했다. 왓포는 사실상 단체여행 상품으로 오면 30분 정도 둘러보고 바로 이동하는 곳일 뿐이지만, 개별로 왔다면 훨씬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태국 마사지가 탄생한 곳이 바로 왓포 마사지 스쿨이고, 이 곳에서 마사지를 실제로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0바트짜리 입장권을 끊고 서둘러 사원 안으로 향했다. 이미 해가 지고 있는 늦은 오후라, 왓포 관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왓포 마사지 스쿨은 사원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잠깐 왓포를 둘러보게 되면 아예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생각보다 이 사원은 정말 넓어서, 지도를 잘 보면서 다녀야 한다. 간신히 마사지 스쿨을 찾아 일단 들어가 본다. 타이 마사지가 탄생한 곳이니, 다른 마사지보다는 타이 마사지가 가성비도 좋고 기념할 만한 경험이 될 것 같아 타이 1시간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1시간을 받아도 한화 14,000원 꼴이니 흐뭇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안에는 대기 중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나마 30분 정도 기다리면 내 차례가 온다길래, 번호표를 받았다. 원래는 예약 없이는 당일 마사지는 받기 힘든 모양인데, 내가 갔던 6월 초는 살짝 비수기라 다행히 받을 수 있었다. 잠깐 요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와서 살짝 대기하니 내 차례가 돌아왔다.
마사지를 하는 공간은 촬영이 불가능해서, 사진이라곤 대기할 때 입구 사진과 마사지 끝나고 받은 음료수 사진 뿐이다. 이곳 마사지 스쿨은 정통 타이마사지를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간소한 탈의실 외에는 마사지를 받는 공간은 가림막도 없이 탁 트여있다. 그냥 옆자리에 누군가가 마사지를 받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다들 누워서 받는다. 그래서 가끔은 반대편에서 받는 사람들과 서로 눈이 마주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동안 싼 가격에 잘 훈련된 마사지사의 전신 마사지를 받을 수 있으니, 인기가 많을 수 밖에. 내가 생각하는 왓포 마사지스쿨의 최고 강점은,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원의 풍경이다. 불교 사원 내에서 타이 마사지를 받다니, 이보다 더 방콕을 리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문 닫기 전까지 남은 1시간 정도는 온전히 왓포 사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나보다 더 나른한 눈빛의 고양이를 바라보며, 혹은 비 오기 전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뾰족하게 솟은 지붕을 바라본다. 사원 내부는 너무나 고요했다. 방콕의 왠만한 왕궁과 사원이 인파로 가득한 걸 생각해 볼때, 아마 내가 방문했던 때가 타이밍이 좋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애써 모른 척 했던, 혹은 너무 흔하디 흔하다고 생각했던 구시가지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이번 여행으로 인해 완전히 깨졌다. 아직도 이 리버사이드 일대의 숨은 명소들은 한국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에도 리버사이드에 새로 오픈한 여러 숙소들과 차이나타운 쪽을 집중적으로 다녀보려고 한다.
방콕에서는 특히 구글맵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방콕에는 현지인이나 관광객 뿐 아니라 엑스팻(사업/해외직업 때문에 해외에 장기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기 때문에 구글맵에 잡히는 거의 대부분의 식당에 대한 별점과 리뷰 데이터가 풍부하다. 별다른 서치를 하지 않아도, 이 일대에 숙소만 잡으면 구글맵에서 적당히 주변 검색을 해서 맛집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래저래 방콕은 앞으로도 자주 오게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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