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여행강의를 집필보다 많이 하고 있어서 작가보다 강사나 선생님(쌤?)이라는 호칭을 자주 듣지만, 어쨌든 여행 컨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여행 가이드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대형 서점에 가면 사람들이 주로 어떤 여행서를 집는지 유심히 지켜보는데, 아직도 나의 여행을 '가이드'해 줄 유명 가이드북 시리즈를 1순위로 선택한다. 평소 블로그 방문자나 수강생으로부터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알아내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오늘은 내가 여행 가이드북을 고를 때의 몇 가지 기준을 공유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려고 한다. 메이저 출판사에 잠시 몸담았던 경험도 슬쩍 덧붙여서.
1. 저자의 이력을 꼼꼼히 본다.
일반적으로 가이드북은 처음 가보는 여행지를 위한 준비라서, 정보의 퀄리티를 쉽사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보통 이 책의 저자는 무조건 전문가겠지, 하는 믿음을 전제로 책을 구입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 출간되는 대부분의 가이드북은 해당 지역의 여행 전문가가 쓰지 않는다. 출판사와 계약 후 길게는 1달, 짧게는 1주일의 단기 취재로도 책 한 권을 뚝딱 만든다. 여행지를 깊이있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인터넷과 블로그 상의 검증된 유명 관광지 위주로 틀을 짠 후 현지 최신 정보를 조금 더하는 식이다. 이는 턱없이 낮은 '제작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취재나 글쓰기를 배우지 않은 일반인(블로거 등)도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가이드북을 쓸 만큼 문턱이 낮아져서, 가이드북을 많이 펴낸 저자라고 무조건 좋은 책을 만들거나 깊이있는 인사이트를 소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계적으로 정보만 모아서, 혹은 경쟁서를 카피해서 만드는 가이드북도 부지기수여서 옥석을 가리는 일이 쉽지 않다. 다행히 자유여행이 본격화된 지금은 너도나도 여행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블로그/커뮤니티 상의 실시간 여행정보가 훨씬 방대하고 정확하므로, 정보로서의 가치나 경쟁력이 이미 많이 낮아지긴 했다.
때문에 나는 저자의 이력을 꼼꼼히 보는 편이다. 그 도시에 30번 갔는지 50번 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현지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깊고 남다른지, 단순히 여행이나 출장으로만 접한 게 아니라 실제 거주 경험은 있는지, 현지에서 주로 무엇을 소비하거나 생산하며 살아가는지 본다. 그래서 나는 여행서만 써온 전업작가의 책보다는 패션, 쇼핑, 디자인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현지 거주자의 여행서를 선호한다. 현지인보다 더 가열차게 현지의 문화를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은, '여행=관광,볼거리'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도시를 향유하는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다. 운좋게 이런 정보를 담은 여행서를 발견하면, 여행의 질이 완벽하게 달라지는 걸 느낀다.
상하이에 취하다 - 윤종철.강서영 지음/조선앤북 |
→ 최근 여행서 중에는 이 책이 좋은 예. 이 시리즈에 묻히는 것 자체가 아까울 정도로 양질의 내용. 단, 디자인과 책 만듦새가 떨어지는 게 심히 아쉬움ㅜ 초보에겐 살짝 어렵고, 두번째 상하이 여행을 준비한다면 강력 추천.
2. 책의 판권을 꼼꼼히 본다.
직접 취재해서 펴낸 책은 그나마 양반이지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이드북 시리즈 중에는 일본의 철지난 여행서를 번역해서 해마다 개정판으로 표지만 바꿔 펴내는 일이 부지기수다. 출판업계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이야기다. 나는 강의 때마다 꼭 이 이야기를 하는 편인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기에 대부분 크게 놀란다. 지금의 30~40대는 대부분 기억할 여행 가이드북의 조상;;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바로 이런 번역서다. 당시에도 세계를 간다가 오역이나 철지난 여행정보가 너무 많아서, 세계를 헤맨다;;는 웃지못할 별명도 붙었더랬다.
이게 옛날 얘기라고? 천만에. 지금도 인기 가이드북의 가면을 쓴 번역서는 널리고 널렸다. 독자가 책 속 판권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판권에는 이 책의 계약조항과 저자, 출판사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책 표지에 저자 이름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다면(무슨 편집부라던가) 판권을 뒤져보면 번역서일 확률이 높다. 여행 정보의 생명은 '현재성'에 있다는 걸 명심하자. 참, 모든 번역 여행서가 다 오래되거나 내용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테마 여행서나 에세이 류는 해외 저자가 쓴 번역서가 훨씬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그녀의 파리 주소록 - 샹탈 토마스 지음/낭만북스 |
→ 유명한 란제리 디자이너 샹탈 토마스의 프렌치 라이프스타일과 파리의 숨겨진 숍 정보가 담겨진 멋진 책. 국내에서는 거의 안팔렸을 듯;; 이 책 덕분에, 파리에서 그녀의 란제리 일러스트가 담긴 코카콜라 리미티드 에디션을 득템:)
3. 21세기 여행 정보의 핵심, 가이드북이 아니라 '위치 정보'
온라인 서점의 서평에 "이 책만 있으면 스마트폰 검색도 필요 없어요!"라는 문구가 있다면, 출판사의 애잔한 자체 작업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여행서 업계가 가장 두려운 건, 모바일 세대가 소비하는 여행정보가 완전히 변화한다는 것이다. 자, 가이드북을 일단 샀다 치자. 소개된 맛집은 '어떻게' 찾아갈 건가? 구글맵에 핀만 꽃으면 나같은 길치도 맛집을 찾아가는 세상에, 주소와 지도만 덜렁 기재된 가이드북 정보는 현지에선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가이드북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1. 여행 일정을 패키지와 다름없이 판에 박히게 만들고, 2. 소개된 곳들이 대부분 관광객 위주이고,(가이드북 보고 찾아간 곳에서 "여긴 왜 이렇게 한국인이 많아?"라며 투덜대지 말자;) 3. 그나마도 지도만 보고 그 곳을 찾아가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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