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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고급 호텔에서 편하게 지내다가 아침 일찍 프리맨틀 역에 도착했을 때
나를 저절로 반겨주는 이는 당연하게도 없다. 이럴 때 여행가이드북의 역할이 중대해진다.
론리플래닛을 뒤적뒤적하다가 발견한 올드 파이어하우스 백팩커스. 일단 역에서 가깝단다.
하지만 초행길이 그리 만만하랴. 무거운 캐리어 질질 끌고 한참을 해맨 끝에
비로소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발견! 아아. 요 소박한 붉은 벽돌건물이구나.
아침부터 예약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인데도, 젊은 털보아찌 주인장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갑자기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며 집에 온 듯한 안도감이 든다.
4일치 방값을 카드로 결재한 후 그는 이불과 그밖의 살림살이가 든 거대한 짐더미를 주며 따라오란다.
끼익끼익 소리가 나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넓은 라운지가 있고, 그곳을 지나면 여성 전용 숙소다.
이층침대 두 개가 놓인 4인실. 갑자기 뉴욕서 머물렀던 비좁은 6인실이 떠오르면서 괜시리 웃음이 난다.
라운지마다, 객실마다 젊고,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기운이 마구마구 느껴진다.
이제, 진짜 여행의 시작이로구나.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자고, 먹고, 쉬는 공간에서.
사실 프리맨틀에서 많이 걷고 많이 구경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많은 시간을 바로
이 사진 속의 공간에서 보냈다. 여성전용 숙소 안에 있는, 작지만 cozy한 라운지.
달랑 소파에 TV밖에 없는 공간이지만, 하루의 시작과 끝은 여기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옆에 있는 키친에서 레토르트를 데우거나 간단한 씨리얼을 만들어다가 그릇째 가져와서
무릎에 얹어놓고 TV보는 일,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선 그저 일상이자 여행의 한 조각이다.
저녁땐 조금만 늦게 와도 소파에 빈자리가 없으니, 서둘러야 하지.
나흘동안 머무르면서, 난 이곳에서 이런 저런 음식을 해먹었다.
처음엔 마트가 어딘지 몰라서 다른 처자들이 해먹는 따뜻한 파스타를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마지막 날엔 일본 식료품점에서 건진 일본 카레라면까지 끓여 먹었다지. :)
조금 아쉬웠던 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는 거. 언니들은 TV를 너무 좋아한다. 말걸면
때릴 거 같아서;; 걍 나도 밥먹으면서 열심히 TV보고, 못 알아들어도 같이 웃어줬다.
프리맨틀의 마지막날, 숙소를 나서는 이른 아침에 아쉬운 눈길로 그곳을 뒤돌아본다.
오래전엔 소방서였을 이 건물. 이제는 오른쪽에 크고 번쩍번쩍한 새 소방서가 지어졌고,
이 낡은 건물은 빈티지한 느낌을 유지한 멋진 게스트하우스가 되었다. 이런 센스쟁이들 같으니.
1층엔 저렴하고 맛있는 인도 레스토랑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한번도 못 가봤다. 저녁이라도 먹어볼걸.
내가 파이어하우스 백팩커스를 선택한 게 탁월했음을, 도착 다음날 아침부터 직감했다.
바로 맞은 편에 서호주의 유명 대학인 노틀담 대학교가 있었던 게다. 아침부터 종종 걸음으로, 자전거로
등교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이라니! 그들의 생기넘치는 발걸음과 함께 여행을 시작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우리네 대학가처럼 술집과 카페가 넘쳐나는 건 아니지만, 작고 예쁜 테이크아웃 카페 한 두 곳이
대학생들로 붐비는 모습이 정겹다. 이런 걸 보고 흐뭇해 하다니, 나도 이제 늙은게야? 흐흑.
마지막 날엔 대학교 주변을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잘 꺼내들지 않았던 필름카메라를 끼고.
숙소와 학교 건물 사이를 돌며 사진찍기 놀이.
이제 볼 거 다 봤다고 생각했던 프리맨틀의 마지막날. 이 작고 아담한 도시는 양파껍질 까듯
새로운 풍경을 자꾸 내보여 준다. 쨍한 아침햇살 받으면서 골목과 골목 사이를
천천히 걷는 기분이 오히려 아름다운 해변을 걷는 발걸음보다 더 가벼웠다면 과장일까.
요란한 간판도 하나 없고, 뭐 하나 튀는 색채도 없는 이 느릿한 골목들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프리맨틀의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나 지금, 제대로 숨 쉬고 있구나.
이렇듯 여행은 내게 언제나 주기만 한다. 고맙고 미안하지만, 그래서 끊을 수가 없다.
이제 다시 퍼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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