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맨틀의 셋째날. 오늘은 로트네스트 아일랜드(Rottnest Island)로 간다. 혼자서도 참 잘 싸돌아다니는 내가 점점 대견해진다.; 배 시간을 맞추느라 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첫 행선지는 어제 봐둔 대형 마트. 생수 한병과 샌드위치를 급히 사들고 항구로 갔다. 첫 배는 오전 9시 반에 출발한다. 서호주 제일의 청정 휴양지 로트네스트 섬으로 가는 비용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리 돈으로 약 5만원 정도의 왕복 페리 티켓을 끊어야 한다. 막 표를 끊고 나니 내 뒤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오늘도 로트네스트로 향하는 관광객들은 무지 많은 모양이다.
비싼 티켓값이 무색하게도 한 30여분이면 로트네스트에 도착한다. 하지만 크루즈 티켓비용이 다가 아니다. 사람 하나 없는 이 무인도를 구경하려면 자전거를 렌트하거나 섬 일주 전용버스를 타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뙤약볕에 걸어다니기란 절대 불가능한 섬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또 만원 정도의 버스표를 끊어 올라탄다. 난 그냥 하루 푹 쉬려고 찾아온건데, 이 정도 비용을 감수하면서 여기 올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부유해보이는 가족 단위 유럽인들이 많다. 어느새 또 동양인은 나 밖에 없구나.ㅡ.ㅡ
섬을 일주하는 버스 베이시커(Bayseeker)는 섬을 한바퀴 돌면서 약 20여 차례 정차한다. 바깥을 구경하다가 원하는 곳에 내려 쉬거나 구경하면 된다. 그런데 퍼스에서 만난 해변과는 또다른 정취를 풍겨오는 로트네스트의 바다는 야생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달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바다가 날것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인간의 손때가 탄 해변과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버스를 타고 섬 한 바퀴를 온전히 돈 후, 다시 섬 입구에 내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피쉬 바스켓(피쉬&칩스와 새우튀김) 세트를 포장해들고 길을 나선다. 항구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유명한 비치, Basin 해변으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해변으로 가는 길은 마치 고요한 수목원처럼 초목으로 우거진 넓은 길이어서 걷기만 해도 행복했다. 오직 로트네스트에서만 볼 수 있는 귀여운 동물 퀘커와도 가끔씩 인사할 수 있다. 한 30여 분을 걸었을까. 내 눈앞에는 버스 창 너머로 바라보던 그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땡볕에 무작정 담요를 깔고 누웠다. 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져간 피쉬앤칩스도 소스 발라 꾸역꾸역 먹어치우고, 공지영 소설책도 1권을 뚝딱 읽을 때 즈음, 팔과 다리는 이미 새까맣게 선탠이 잘 되어있다.ㅡ.ㅡ 아까 기념품점에서 사들고 온 엽서에는 친구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적어본다. 엽서는 잠시 후 섬을 떠나기 전에 이곳 우체통에 넣을 것이다. 내 눈 앞의 풍경을 담은 엽서가 한국으로 날아간다는 것, 정말 멋진 일이다. :)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왜 그리도 행복해 보이던지.
한국에서는 이런 여유를 평생 누려보지도, 알지도 못한 채 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행지, 여행...어쩌면 지금 내가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이 모든 것들이 빈부격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행위가 아닐까.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나의 마음은 불편해지기만 했다. 왜일까. 비싼 돈주고 여기까지 와서 왜 우울함을 느껴야만 했을까. 드디어 읽어버린 공지영의 소설 때문일까. 그녀 특유의 발가벗긴 듯 직설적인, 삶과 사랑에 대한 태도 때문일까. 진심을 다하면 상처도 빨리 회복된다는데, 내 사랑은 진심이었을까. 왜 그리도 눈물만 계속 흐르던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친구에게 보내던 엽서에 깜박 잊고 못 쓴, 어쩌면 그녀를 다시 슬프게 할까봐 쓰지 않은 말이 있다. "우린 어쩌면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아픈 것일지도 몰라. 상처를 받더라도 정면으로, 구차하게 부딪히고 와야 할지도 몰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더 오랫동안 이 자리에 머물러 버릴지도 몰라..." 라고 말이다. 아직 내게도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뭐가 가장 옳은 선택인지, 그냥 이대로인게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나도 많이 다치긴 다쳤나보다. 상처 받는게 이렇게도 두려운 것을 보면. 상처라는 건 없다고 부르짖던 용감한 나는 어디 간걸까. 그때의 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처음 로트네스트에 도착할 즈음엔 서호주의 관광 상술에 혀를 내둘렀지만, 막상 섬 자체를 대하고 나니 한번쯤은 올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저분하고 사람많은 휴양지를 가는 데에도 일반적으로 상당한 돈을 쓰는데, 세계적으로 가장 깨끗한 인도양 비치와 섬을 경험하는 댓가로는 그리 큰 비용이 아닌 것 같다. 특히 버스를 타고 지나오면서 구경했던 살몬 베이(Salmon Bay)의 절경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그때 버스에 함께 탄 여행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데다, 몇몇은 계획도 없이 거기 내려버렸다는...ㅎㅎ 언제 또 서호주를 올지 기약이 없으니, 로트네스트에서 하루를 보내길 참 잘한 것 같다. 하지만 만약, 혹시라도 다음에 또 오게 되다면, 그땐 다른 사람들처럼 꼭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오리라. 로트네스트는 혼자보다는 함께일때 더욱 아름다운 섬이다. 이외수 아찌가 그랬지.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다면, 어디든 무인도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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