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ie X Tallinn - 탈린의 창조혁신 기지, 텔리스키비에서 보낸 하루

헬싱키에서 굳이 배를 타고 탈린까지 온 단 하나의 이유, 에스토니아의 현재가 담긴 크리에이티브 시티 때문이다. 중세시대 구시가 관광지로만 알려진 탈린에서, 어떻게 유럽 최고의 IT/문화 허브가 만들어졌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겨울 비수기의 한적함 속에서도, 빛나는 아이디어와 예술성이 담긴 작은 가게들과 카페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여기서 만난 버거 한 접시는, 내 모든 여행을 통틀어 만난 버거 중 Top 3 안에 든다. 









과거의 탈린을 지나, 현재의 탈린으로 @ 텔리스키비

탈린에 오고 싶었던 건 구시가 관광 때문이 아니라, 바로 텔리스키비에 오고 싶어서였다. 개인적으로 최근 에스토니아가 스카이프를 탄생시킨 IT 벤처강국으로 성장한 역동성에 큰 관심이 있었다. 낡은 중세도시가 유럽 최고의 와이파이 속도를 갖게 된 배경에는 정부 주도적으로 청년을 위한 장을 마련해주는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탈린에선 일종의 신시가지인 이 지역에는, 이들의 오피스와 숍이 입주해 있는 자유분방한 빌딩 몇 채가 모여 있다. 여기가 탈린의 크리에이티브 시티다. 


구시가 성벽 입구 앞에서 탈린카드로 버스를 타니, 몇 정거장 되지 않아 텔리스키비에 금새 도착했다. 크리에이티브 시티로 가는 길에는 그 전부터, 아마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을 정겨운 풍경의 시장이 먼저 나를 맞는다. 채소만 파는 실내 시장, 오래된 중고물품을 파는 빈티지 시장, 그리고 몇몇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유럽의 디지털 노마드가 모여드는 곳, 크리에이티브 시티

외벽에 아티스틱한 그래픽이 그려진 빌딩 몇 채를  찾았다면, 그 곳이 바로 탈린의 젊은이들이 작고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크리에이티브 시티다. 벌써 심장이 두근두근한 것이, 역시 내 여행 스타일은 너무나도 확고하게 도시의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 맞춰져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주로 윗 층에는 오피스와 스튜디오가 입주해 있고, 1층에는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소비할 수 있는 카페나 숍 등이 입주해 있다. 언뜻 둘러보니 나같은 외부 방문자는 거의 없고, 카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입주해 있는 직원이나 현지 젊은이들로 보였다. 노트북을 하거나 미팅을 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요즘 에스토니아는 저렴한 물가와 쉽게 사업자를 낼 수 있는 비즈니스 친화적 환경 때문에, 유럽의 젊은 창업 희망자들이 이곳을 선호한다고 한다. 실체 없는 전시행정으로 나를 몇 번이나 분노하게 했던, 우리의 '창조혁신' 사업이 자꾸만 오버랩되는 건 왜 때문일까...쩝. 











오래된 빌딩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이 센터의 1층은, 온전히 젊은 오너들에게 각각의 공간을 맡겼다. 그런데 어쩌면 이 많은 숍들이 제각기 작고 좁은 테마로 독특하게 숍을 꾸려 가는지! 인도 잡화만 파는 숍, 빈티지 부츠만 파는 숍, 에스토니아 로컬 디자이너 셀렉숍, 유럽의 미술용구만 모아서 파는 숍 등 하나하나 재치가 넘친다. 

열심히 돌아보다가 아르떼 숍에서 동생이 부탁한 미술 붓을 하나 사고, 아기 옷 셀렉숍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에스토니아 풍의 아기 원피스를 한 벌 샀다. 물가도 어찌나 저렴한지.ㅠ 사고 싶은 게 넘나도 많았다는.










나만 혼자 먹기엔 심하게 아까운, 버거 한 접시 @ F-Hoone

어제 구시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먹었던 올드 한자에 이어, 오늘은 신시가인 텔리스키비의 맛집 한 곳을 찾았다. 이곳 크리에이티브 시티엔 너무너무 가봐야 할 카페와 맛집이 많았지만, 그 중에 한 곳을 정말 어렵게 고른 것이다. 벌써 식당에 들어섰을 때의 그 아늑하고 아름다운 공간 자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어디서 식사를 해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는 테이블 중 하나를 꿰차고 앉아 찬찬히 메뉴를 본다. 

이곳은 탈린의 젊은이들이 가볍게 점심을 먹는 유럽식 브런치 레스토랑인데, 진짜 북유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서 일단 한번 놀랐다. 두루 맛을 보고 싶어서 브루스케타와 버거, 이 식당의 이름을 단 수제 에일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먼저 나온 맥주와 4종 브루스케타를 받았는데, 오 세상에. 에피타이저 메뉴에 적혀 있어서 가볍게 카나페 정도로 생각하고 주문한 브루스케타가 일단 대박이었다. 이거 한 접시만 다 먹어도 왠만한 아가씨들은 배가 불러올 듯. 이곳에서 자체 제작하는 IPA맥주도 컵에 따라보니 영롱한 호박색과 고운 거품이, 벌써 느낌이 온다. 상큼하면서도 묵직한 향이, 역시 최고. 


왠 처자가 혼자 와서 한 상 가득 주문을 해놓은 게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는지, 옆 테이블의 나이 지긋하신 프랑스 커플이 말을 걸어온다. 심지어 식사도 거의 마친 그들이, 그 맥주 뭐냐며 궁금해 하길래 남은 술을 병째 줬더니 진짜 맛을 보더라는.ㅋㅋ 여행을 오래 하다보니, 처음 간 레스토랑에서도 가장 맛있는 메뉴를 뽑아내고 주문하는 스킬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준이 된;;









이곳의 버거는 우선 검은 통밀빵을 쓴다. 근데 딱딱하거나 까슬거리지 않고 꽤 부드럽고 담백해서, 재료를 잘 살려주는 독특한 빵이었다. 톱에 뿌려진 프라이드 어니언부터 두툼한 소고기 패티, 구성된 풍성한 채소와 곁들인 사워크림 소스, 고구마와 감자를 섞어 프라이한 곁들임까지 100점 만점에 100점 주고 싶은 버거였다. 여태껏 단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조합인데, 충격적으로 훌륭한 디테일을 지니고 있다. 사실 어제 먹었던 올드 한자의 버거 마이스터도 그렇고, 잘 알려지지 않은 에스토니아의 음식 문화가 이렇게나 흥미로울 줄이야. 



나는 텔리스키비를 보면서, 요즘 전 세계의 창업지원 사업이 다 이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내용물까지 같은 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1인 창업자가 오픈 오피스를 사용하는 고정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고, 투자나 정부지원도 IT에 한정되어 있다. 스몰 비즈니스가 모여서 서로 시너지를 내고, 계속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카페/숍/식당이 이들 오피스 주변에 모여 있는 텔리스키비는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나에겐 부러움 그 이상의 대상이었다. 


진한 아쉬움을 안고, 다시 헬싱키로 돌아가 여행 박람회 참가를 위한 본격 출장 일정에 뛰어들 시간이다. 하아. 어언 3달간 연재를 했는데도 아직 본론이 시작되지도 않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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