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나이와 비례해서 점점 커져만 간다. 하지만 올해는 작심삼일이 될만한 어설픈 새해 계획을 다이어리에 끄적이며 위안하는 대신, 나의 한계를 넘어 조금은 힘든 것에 도전하면서 새해를 맞고 싶었다. 본격 등산을 취미로 하시는 부모님과는 달리 '내려올 산을 뭐하러 올라가나'의 30년 철학을 지켜온 내가, 2012년 첫 시작을 무려 한라산 등반으로 시작했다. 한라산은 역시, 특별했다.
올레길도 아직 입성을 못했지만, "그래도 겨울에는 한라산 눈꽃트래킹이지" 하며 호기롭게 GAO 프로그램을 신청할 때만 해도, 위의 사진이 유일하게 400D로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이 될지는 몰랐다. 눈이 1m가 넘게 쌓여있는 산에 건방지게 청바지를 입고 DSLR까지 들쳐메고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늘 하루가 내게 어떤 고난(!)을 안겨줄 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라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난 거의 등산을 해보지도 않은 꼬꼬마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그렇게 "트래킹이라 쓰고 히말라야 등반이라 읽는;;" 눈꽃 트래킹은 시작되었다.
어리목 코스는 잘 알려진 한라산 트래킹 길이지만, 초보자에게는 그리 만만찮은 코스이기도 하다. 정상까지 약 2시간 반 쯤 걸렸는데, 초반 1시간은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만 계속 이어진다. 미끄러운 눈길, 아이젠 착용은 필수다.
점점 나는 말이 없어졌다...어느새 힘들다는 소리도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가방 뒤에 매달았던 스틱을 빼들어 겨우 지탱하며 오른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눈속에 콱콱 박히니, 발걸음이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 처럼 무겁다.
평소 산을 즐겨 타시는 부모님도 오늘만큼은 힘이 부치신지 나보다도 한참 쳐져서 올라오신다. 묵묵히 내 뒤를 따라오는 동생만이 아이폰으로 내 낑낑대는 뒷모습을 겨우 남긴다. 총 10명으로 출발한 오늘의 트래킹 참가자들은 자연스레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졌고, 선발대는 이미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내 페이스를 지킬 수 밖에. 채 1시간도 안되어 벌써 '정신력'으로만 버텨야 하는 비루한 체력을 원망하면서.
그러나 한라산은 내게 고난만 안겨주지는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오르막은 어느새 장대한 평원으로 모습을 바꾸고,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던 두 다리도 한결 편안해진다. 이제 윗세오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 짜낸다.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할 한라산의 장관, 구름 위에 서있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등산'이라는 액티비티에 대해 철저하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스르륵 열린다. 한라산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어리목 등반 2시간 만에 드디어, 윗세오름 도착!
토요일이라 그런지 "눈꽃 반, 사람 반"일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이곳 정상까지 와 있다. 대부분 여기 도착하면 컵라면을 사먹는다는데 그 맛도 참 별미겠지만, 우리 일행은 GAO 프로그램에서 준비해준 특별한 도시락을 개봉할 시간이다. 새우튀김이 든 김밥, 아직도 보온병에서 뜨끈뜨끈한 신라호텔 표 수제오뎅, 큼지막한 천혜향을 까먹으며 꿀맛같은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정상에 오니 자외선이 장난이 아니다. 초보 아니랄까봐 제대로 선스크린 제품을 챙겨바르지 않고 대충 비비크림으로 때웠더니, 얼굴이 벌겋게 익어오른다. 눈꽃에서 나오는 자외선은 일상 때의 4배 이상이라고 하니, 차단 제품은 꼼꼼히 챙겨바르고 선글라스도 꼭 쓰도록 하자.
밥도 든든히 먹고 쉬었겠다. 이제는 한라산 눈꽃 트래킹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스런 광경을 꼼꼼히 눈에 담을 차례다.
하산 길인 영실 코스는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대단한 장관을 선사했다. 사실 어리목을 오를 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오르막이 심해서 제대로 경치를 구경하기가 어려웠는데, 영실 코스로 접어들면서 다이내믹한 한라산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다. 특히 눈꽃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좁은 산길을 통과할 때는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설레고,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를 때는 자연의 위대함에 숙연해진다.
영실 코스가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결코 쉬울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전날 눈이 워낙에 많이 오는 바람에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깊은 구덩이에 발이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길도 좁은데 엄청난 등산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가다가 비켜서고 멈춰서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때로는 오가는 등산객과 환하게 인사하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눈꽃을 함께 즐기는 게 또 트래킹만의 즐거움이 아닐까.
만약 혼자서 한라산 트래킹에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사진 오른쪽의 환하게 웃으시는 GAO님 덕분에, 나같은 초보자도 5시간짜리 트래킹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제주가 고향이라는 GAO님은 "더 못하시는 분도 있어요. 어리목에서 그냥 내려가는 분도 계신데, 오늘 정말 잘하신 거에요"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신다.ㅠ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산을 못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구나. 새삼 새로운 힘과 에너지가 솟는다.
이번 제주 겨울여행의 화룡점정은 단연코, 한라산이다. 캐나다의 로키 산맥도,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도 꼭대기까지 가봤지만 한라산만큼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그만큼 한라산 트래킹은 지금까지 몰랐던 한국 여행의 매력까지 새삼 깨닫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케이블카로 스윽 올라갔다 내려오는게 아니라 내 발로 직접 밟고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일까. 다른 계절에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을 그 산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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