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살면서 너무 지치고 힘들 때,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책이나 여행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자족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현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그 현실이 나를 힘들게 하는 무한루프가 반복된다. 삶을 이렇게 만드는 여행은, 안 가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나의 내면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이나 책, 컨텐츠를 찾고 직접 만나러 가는 것. 가장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예전에 한 여행서 저자가 내게 찾아온 적이 있다. 자기 이름으로 낸 국내여행서 한 권을 들고 와서 내게 건넸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덜컥 1인출판사를 차리고 창업지원 받아 사무실 입주까지 한 상황. 하지만 사회생활 경력이라곤 오로지 대기업에서 한 업무를 담당한 경험 뿐이고, 출판이나 전자책 관련해서는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어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 분에게 건넨 조언은 딱 하나. "재취업하세요. 앞으로 평생 하고 싶은 분야의 회사로요"
며칠 전 그분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출판 쪽은 아니지만 연관 직종에 취업해 착실하게 경력을 쌓고 계시더라.
예전에도 일기에 쓴 적이 있지만, 20~30대에는 하기 싫은 일을 견디면서 취미로 스트레스를 풀기보다는, 확실한 특기를 두세 가지 연마하는 게 훨씬 삶이 풍요롭고 중년 이후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고 본다. 만약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당 분야에 입사해서 프로 경력을 갖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특히 글을 쓰면서 먹고 살고 싶다면, 더더욱 글쓰기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며 오랜 시간 내공을 단련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전 세계의 새로운 호텔을 취재하고 강의하는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 긴 직장생활이 중요했다.
지금까지 나의 커리어는 상당히 진폭이 넓었다. 20대 초중반엔 여행작가나 전국구 강사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다. 그때그때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일을 찾아 하나씩 해나갔다. 대신 젊은 혈기에 혼자 뭘 해보겠다고 시작했던 일은 대부분 실패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실질적으로 쓰이는 능력은 대부분 선배와 상사에게 깨져가며 어렵게 배운 것들이다. 분명한 건 여행지 취재기자와 IT 벤처/대형 출판사 마케터로 쌓은 직종별/업종별 경력이 지금 하는 일을 단단하게 완성시켰다. 물론 긴 직장생활 동안 개인적으로 준비해온 것(블로그, 영어, 책 출간, 글로벌 컨테스트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것이 '커리어'로 완성된 건 직장에서 쌓은 생생한 경험 덕분이었다.
만약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10년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먼저 그려보는 작업이 '위로'보다 훨씬 힐링이 될 것이다. 나의 경우 여행에 대한 열망 이전에, '시간과 장소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일할 수 있는' 독보적인 포지션과 직업을 강렬히 원했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팸투어 따라다니며 광고여행기나 올리는 취미형 파워블로거로 안주하지 않고, 그 어떤 여행기자보다 더 파워풀한 '미디어'가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글로벌 업계와 일하기 위한 환경을 오랫동안 구축했다. 그것이 돈을 쓰는 여행이 아닌 '돈을 버는 여행이자 커리어'가 되어 기존에 없던 여행강사로 데뷔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작이었다. 이런 준비가 없었다면 나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로 온전히 살 수 있게 해준 건 막연한 여행이 아니라, 먼저 나에 대해 알고 강점을 찾아내는 나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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