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뉴욕 여행의 마지막 3박을 위해 체크인한 호텔은, 5번가 한복판에 위치한 명실공히 최고의 특급 호텔 '랭햄 플레이스 피프스 애비뉴'. 기본 객실의 1박 가격이 최소 80~90만원 대에 육박하지만, 스위트룸에는 키친이 딸려 있고 위치도 너무 좋아서 가족여행으로 온다면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호텔이다. 한국에는 후기가 거의 없고 여기 비교적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상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Room - Residence Suite
최근 3~4년간은 연간 최소 50박 이상 전 세계 새로운 호텔을 숙박하며 꾸준히 경험치를 올려가고 있다. 1달간의 시카고-하와이-뉴욕 여행의 메인 테마 역시 호텔이었다. 특히 뉴욕에서는 체급을 훌쩍 올려서 5성급 중에서도 넘사벽 중 하나인 랭함 플레이스를 최종 선택해 마지막 3박을 머물렀다. 한국에서 뉴욕 호텔을 검색하면 대부분 저가형 호스텔이나 한인 민박 또는 비즈니스 호텔이고, 럭셔리한 뉴욕 자유여행에 맞는 호텔은 찾기 어려웠다. 1박에 5만원짜리 숙소 후기도, 130만원짜리 숙소 후기도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뉴욕행을 계획하면서 Langham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고, 레지던스형 숙소를 원했기 때문에 랭함 플레이스만한 호텔은 없다고 생각했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포함된 기간에 머물렀는데, 쇼핑에도 이보다 좋은 위치는 찾기 힘들다. (호텔 뒷길로 접어들면 타임스퀘어와 메이시스가 있는 뉴욕 쇼핑가가 펼쳐진다)
내가 머무른 레지던스 스위트룸은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고, 침실 깊숙히 욕실이 있는 엄청나게 넓은 구조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맨해튼과 특히 5번가 부근 특급 호텔 중에서는 최대 넓이의 객실이라고 한다. 이 날도 이전 숙소 체크아웃 시간 맞추느라 오후 12시경 일찍 도착했는데, 객실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며 친절히 얼리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객실까지 직접 와서 모든 시설을 정중하게 소개해 주신 직원 분은 중국 배우처럼 멋진 훈남이셨음! 랭햄은 시카고도 그렇고 뉴욕도 동양계 매니저 분들이 많아서 조금 더 편안하달까. 특히 랭햄 플레이스 뉴욕에는 한국인 직원이 계시다는! 영어에 부담을 느낀다면, 혹은 한국어 컨시어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면 프론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후덜덜한 스위트 룸과의 첫인사가 끝나고, 천천히 방을 둘러본다. 넓은 거실을 휘 돌아보고 나면 와인바처럼 생긴 테이블과 키친이 있는데, 분위기있는 와인테이블에선 매일 한식 먹기 바빴다는 슬픈 후문이..ㅋㅋ 키친에 설치된 렌지는 오븐과 전자레인지 기능이 모두 갖춰져 있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조리할 수 있고 조작도 매우매우 편리했다. 부엌이 있다고 해도 거창한 요리를 할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포장음식 데워먹는 수준이지만, 럭셔리한 커트러리와 고급진 레인지를 이용해 한 상 차려놓으면 레스토랑 식사에 뒤지지 않는 만족감을 준다.
테이블 한 가운데 차려진 푸짐한 웰컴 바구니. 삼색 빼빼로(?)와 캐러멜 팝콘, 견과류는 맥주 안주로 잘 먹었고, 과일도 너무 많이 갖다 놓아서 다 먹지도 못했다는.
냉장고의 무알콜 음료들은 무료로 매일매일 리필된다. 델타항공에서 처음 마셔보고 마음에 들었던 씨그램의 진저에일과 토닉워터가 있어서 거의 매일 시원하게 마셔주었다. 네스프레소는 기본 탑재.:) 역시 캡슐은 매일 갖다 주신다. 내가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 객실에는 커피만 있고 차 티백 종류는 없어서 좀 의외이긴 했다. 물론 나는 커피파라서 딱히 차를 마실 일이 없기는 했지만.
거실과 분리된 아늑한 침실은 그야말로 이번 여행에서 묵은 모든 호텔 모두 통틀어 1등.(물론 1등으로 비싸기도 하고ㅋㅋ) 어찌나 아름답고 편안하던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미니멀한 객실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들었다.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온다면 딱 이런 객실이면 정말 좋을 듯. 베딩 자체도 너무 고급스러웠고, 뉴욕에서의 일정이 대부분 쇼핑이었기 때문에 피곤한 하루를 편안하게 마감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채광이 환하게 비쳐드는 욕실은, 그야말로 랭햄 특유의 우아함을 담고 있는 여성스러운 공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추안 스파의 어메니티도 어김없이 준비되어 있다.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으며 여행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오전 시간에는 욕실 조명을 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고 환했다. 이게 우리 집 욕실이었으면ㅜㅜㅜ
특히나 숨겨진 멋진 기능이 하나 있는데, 욕실 거울 뒤에 사실은 TV가 있어서, 낮엔 잘 안 보이지만 밤에는 리모콘으로 TV를 켜놓고 입욕을 즐길 수 있다. 미드나 영화에서나 보던 초호화 호텔 아파트먼트 체험ㅋㅋ 뉴욕에서 하게 될 줄이야. 미국 여행 초반이었으면 매일 이거 틀어놨을텐데, 1달동안 영어 채널 보는 것도 너무 지겨워서 주로 내 폰으로 듣고 싶은 걸 틀어놓긴 했지만.ㅋ
반투명한 커튼을 슬쩍 걷으면, 맨해튼의 스펙터클한 풍경이 꿈처럼 펼쳐진다. 언제나 노란 택시가 줄줄이 밀려 있는 5번가의 분주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8년 만의 뉴욕이다. 8년 전 여행기자를 그만두고 IT업계로 옮긴 뒤 받은 첫 휴가, 무작정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오래된 유스호스텔 4인실 도미토리, 삐걱대는 2층 침대에 몸을 뉘이며 그렇게라도 뉴욕을 봐야했던 20대의 내가 문득 떠올랐다. 그 때도 이 5번가를 걸어서 지나쳤겠지. 언젠가는 꼭 멋지게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을 하며 말이다. 40대, 50대의 나는 또 어떤 여행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Epilogue
오늘은, 블랙 프라이데이였다. 한 달간 미국에 있으면서 쇼핑도 미뤄놓고 기다렸던 바로 그 날이다. 게다가 맨해튼 최고의 호텔 스위트룸에서의 투숙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원피스도, 아무리 멋진 호텔도, 따뜻한 한식 한 그릇만큼 내게 행복지수를 높여주진 못했다.
점심도 안 먹고 쇼핑을 하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을 즈음, 순식간에 다리가 풀리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그것도 5번가 한 가운데서. 무릎에 큰 상처가 났지만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나가는 뉴요커들이 아유 오케이?를 묻자, 비로소 내가 오케이하지 않은 상태란 걸 알았다. 재빨리 한식을 검색하자 호텔 5분 거리에 코리안타운이 있었다. 아직 귀국도 안 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신한은행은 헛것인가...할 때 즈음, 동대문 엽기 떡볶이와 공차 앞에 모여있는 앳된 유학생들...아, 여기구나.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한식당 '우리집'은 뉴욕에 있는 동안 나의 구세주였다. 혼자 여행하는 내게 원하는 모든 음식은 거기 다 있었다. 심지어 점심과 저녁엔 뷔페식으로 싸갈 수도 있다.
뉴욕 오기 전에 취재처로 조사해놨던 백 군데가 넘는 맛집 리스트는 다 버렸다. 앞으로 3일 간은 한식만 섭취할 테다. 브루클린 라거 한 병에 김치찌개와 불고기덮밥이면, 완벽하다. 어번아웃피터스에서 건진 원피스를 입어볼 에너지가, 맨해튼의 야경을 바라볼 힘이, 비로소 생겼다.
깨알같은 뉴욕 여행기는 조만간 (하와이 먼저 정리하고) 연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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